
아슬아슬한, 그러나 아름다운 삶
(<즐거운 일기>, 최승자, 문학과 지성사, 1984)
당신에게 있어서 생일은 어떤 의미인가? 저마다 대답은 다를 테지만, 나에게 생일이란 굉장히 특별한 날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생일 축하해”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의미이고, 당신이란 사람과 함께 살아있음에 감사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생일 축하해”라고 말할 때는 나와 같은 의미를 담아서 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하는 말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는 생일을 맞이할 때면 다른 날보다는 기분이 좋아진다. 며칠 전 맞이한 생일도 그렇게 기분 좋게 보내고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내 생일이었던 7월 13일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비가 너무 많이 쏟아져 밖에 나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친구와 함께 짜장면을 시켜서 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여성분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와 친구는 ‘또 어느 커플이 싸우나보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열어보니 구급차와 경찰차가 함께 와 있었다. 친구가 창문을 통해서 유심히 밖을 보더니 “사람이 죽었다”라고 말했다. 나는 차마 사람이 죽은 현장을 볼 자신이 없었기에 애써 외면하려 하였다. 하지만 무언가에 끌리듯 나도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하얀 천이 덮여있는 것을 보았다.
친구는 밖에 나가 어찌된 일인지 물어봤고, 경찰관은 “60대의 한 남성이 떨어져서 죽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확인 중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전에 들었던 무언가 ‘쿵’ 떨어지던 소리, 그 소리는 그분이 떨어져서 났던 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확인 결과 타살이 아닌 자살로 결론이 난 것 같았다.
‘나’라는 사람이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날, 누군가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였다. 이 사실 앞에서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혼란을 겪었다. 쉽사리 남의 인생을 판단해서도 안 되고 가늠해서도 안 되지만, 내 머릿속에는 자꾸만 ‘그분이 왜 삶을 마감하였을까’,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분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날 이후 뉴스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집중 호우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 실종자 수색을 나섰다 목숨을 잃은 해병대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초등학교 교사까지.
일련의 죽음들을 겪으면서 나는 생일의 의미를, 더 나아가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태어났다는 것은 정말 축하받을 일일까? 살아있다는 건 정말 축복일까? 물론 신학적인 관점에서, 또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나는 이 ‘그렇지만...’ 이후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삶이란 가수 이소라가 <Track 9>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에 “존재하는 게 허무해 울어도 지나면 그뿐”인 것이 아닌가. 작가 존 밀턴이 <실낙원>에 썼던 “제가 부탁했습니까? 창조주여, 흙으로 빚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끌어올려 달라고?” 문장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시인 최승자는 시집 <즐거운 일기>에 수록된 시 ‘20년 후에, 지芝에게’서 이렇게 말한다.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최승자는 말한다. 살아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는 일이라고. 참 아슬아슬하다고. 그러나 그렇기에 아름다운 일이라고.
이 구절만 본다면 최승자는 이상적인 희망을 말하는 것만 같고, 절망과 좌절을 모르는 사람 같다. 그러나 시집 <즐거운 일기>는 희망보다는 절망을 더욱 많이 말한다.
“지금 내가 없는 어디에서 죽음은 내가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다./도망갈 수 없어! 도망가지 못해!/.../죽음의 눈빛은 깊고도 깊어 - <지금 내가 없는 어디에서> 부분
“슬퍼하기 위해/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물러가라 모든 밝음/물러가라 모든 빛들” - <시간 위에 몸 띄우고> 부분
“이 세계를, 이 세계의 맨살의 공포를/나는 감당할 수 없다./그러나 밀려온다,/이 세계는,/내 눈알의 깊은 망막을 향해/수십 억의 군화처럼 행군해 온다” - <무제2> 부분
심지어 <20년 후에, 지芝에게>서는 살아있다는 건 아슬아슬하게 아름답다고 말한 뒤 바로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나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라고 말한다.
그러니 최승자는 대책없는 희망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확실한 절망을, 현실의 무정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해답은 ‘20년 후에, 지芝에게’의 마지막 부분에 있다.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 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우리의 삶은 언제나 아슬아슬하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사회와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늘 길을 헤맬 수밖에 없고, 아무리 헤매도 길을 찾지 못해 그저 서서 울 수밖에 없는 순간도 찾아온다. 그러나 그럼에도 삶이 아름다운 건 혼자라고 생각하며 헤맸던 길 위에 아름답고도 슬픈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나’가 이르게 된 모든 끝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내게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 그러니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주변 사람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것이다.
김윤형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