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나치게 절망하지 않고, 지나친 희망도 가지지 않는
(<히로시마 노트>, 오에 겐자부로, 삼천리, 2012)
“원수폭 피해백서가 명백히 밝히려 하듯이 히로시마는 핵무기 위력의 증거가 아니라, 핵무기가 초래할 인간의 비참함의 극지를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그것을, 일단은 잊어버리고 어떻게 해나가자는 것이 이 세상의 일반적인 태도이다.”(168)
핵과 플라스틱은 인류의 일상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여전히 ‘꿈의 물질’이라는 명성이 자자하지만, 이제는 재고해야 할 국면을 맞이했음에 분명하다. 원자력에너지와 플라스틱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는 거라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체념해서는 안 된다. 그런 무기력은 여섯 번째 대멸종, 파멸마저 방관하는 일이다. 수없이 많은 디스토피아들을 상상해볼 수 있겠는데, 거기에는 플라스틱과 핵을 누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젠가 엠마뉘엘 르파주의 <체르노빌의 봄>을 인상적으로 읽은 바 있다. 폐기된 땅 체르노빌을 탐방한 이야기가 그래픽노블로 재구성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발이 닿지 않기에 아름답게 회복되어가는 자연의 모습에 경탄했고, 원자력발전을 신봉하는 인류의 어리석음에 한탄했다. 지속되는 방사능누출로 인간이 어찌 손 쓸 바를 모르고 도망치듯 방치했던 원자력발전소. 전세계적으로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체르노빌 사례 단 한번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경고하듯, 다음 차례는 우리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일찍이 일본은 핵의 위력을, 그 참담함을 이미 겪었다. 70년 여년의 세월은 그 고통을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피폭의 경험은 유효했고, 현재진행형이었다. 고통당하는 이들을, 그들이 울리는 경종을 한사코 외면했기에, 핵발전소가 건실하게 운영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일평생 시대의 증언자로 살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프리모 레비가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히로시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간의 비참함의 극점에 대해 침묵하고 망각해 버리는 대신에,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기록하고 연구하려고 한다는 사실. 이것은 실로 비상한 노력에 의거하는 무거운 행동이다. 그 때문에 그들이 극복해야 하는, 혐오감을 비롯한 모든 감정의 총량조차도 히로시마 밖의 사람들은 충분히 헤아릴 수 없다. 히로시마를 잊고, 히로시마에 대해 침묵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지니는 사람들이 거꾸로 구태여 그것을 얘기하려 하고, 연구하려 하고, 기록하려 하는 것이다.”(174-5)
일본의 대문호 오에 겐자부로, 수개월 전 작고한 그는 1963년~1964년에 히로시마를 방문하였고, 이듬해 <히로시마 노트>를 발행한 바 있다. 피폭자들의 날 것 그대로의 음성들이 담겼다. 비참한 사건을 보도할 때, 격렬한 논조로 핏대를 세우며 누군가를 고발하거나, 독자들의 적개심을 자극하거나, 값싼 동정심을 추동하거나 혹은 취재한 이들을 대상화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그러지 않았다. <히로시마 노트>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겸허한 자세로 피폭자들의 지혜를 배우고자 했다. 히로시마의 ‘모럴리스트’라고 칭송하며, 그들의 사상과 목소리를 조명하였다. <히로시마 노트>의 골자를 엿본다면, 하나는 핵무기가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피폭자들의 지혜를 전파하는 일,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핵무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메시지, 그리고 인간다움을 회복하자는 메시지로 변주해볼 수도 있겠다. 기실, 이 둘은 양분되지 않을 것이다.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개체 간 구분도 되고, 멸종되는 시점도 일부 상이할 수도 있겠지만, 운명공동체라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재앙을 자초해서는 안될 것이고, 또 좌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예언자들과 지혜자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고 오에 겐자부로의 발자취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들로서는 피폭자의 동지가 되는 길 외에 정신이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 나갈 방법이 없다. 나는 원수폭 피해백서 운동에 동참하겠다. 그리고 나는 시게토 원폭병원장을 비롯한, 진실로 히로시마의 사상을 체현하는 사람들, 결코 절망하지 않고 그러나 동시에 결코 지나친 희망을 품지 않고 어떠한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나날의 일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 내가 가장 정통적인 원폭 후의 일본인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295-6)
김민호 목사 (지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