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정상입니까?
(<순응주의자>, 알베르토 모라비아, 문학과 지성사)
이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크리스천들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아시다시피 이 세상의 문화예술은 주제, 소재 면에서 그다지 기독교적이지 않다. 크리스천으로서 기독교적이지 않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책, 영화, 음악들을 절제하고 신앙 지침이 되는 서적만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적이지 않은 혼란스러운 세상 그대로를 옮겨 놓은 듯한 작품 속에서 나름의 미적 가치를 느끼면서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구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길러낼 것인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 <순응주의자>는 불순한 소재들 속에 신앙적 지표를 숨긴 채 정신없이 혼재된 이야기를 펼쳐내며 기독교 윤리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려는 신호들이 섞여 있다. 이런 점에서 그동안 소개한 여타 책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인간에게 삶은 너그러운 자연이 제공하는 나태한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며, 끊임없이 분투해야 할 뿐 아니라 매 순간 더 큰 문제들의 경계 안에 있는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큰 문제들은 삶의 문제라는 전체적인 문제 안에 있었다. (본문 437p)
주인공 마르첼로의 유년기부터 죽는 순간까지를 기록한 이 소설은 ‘비정상적인 기질’을 정상화하기 위한 삶의 이야기다. 정상적이지 않은 가정의, 공모와 공감을 받지 못한 파괴 욕구, 예쁘장한 외모가 불러일으키는 성적 오해로 저지른 우발적인 살인이라는 유년기는 마르첼로가 어째서 파시즘의 공권력과 결혼과 암살 작전에 순응하게 되는지 독자를 충분히 설득시킨다.
주된 플롯은 공감 받지 못한 사적인 폭력성의 분출과 관료적 정상을 위한 체제 순응, 정상적인 남자의 일생을 그대로 따르고자 관습의 순응으로서 결혼하는 시기를 맞물리며 긴박하게 이야기를 끌어간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문제적 인물들, 상황들, 혐오와 불안을 일으키는 다양한 사건과 기묘한 분위기는 마르첼로의 정상성에 대한 강한 열망과 좌절감을 교차시킨다. 가령, 결혼을 통해 보통 남자의 일생에 귀속되고 싶어 평범한 여성인 줄리아와 결혼하지만 신혼여행 첫날 자신의 아내가 수년간 친족 간 성범죄의 희생양으로 이미 처녀가 아닌 ‘정상적’이지 않은 여성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또한 그에 대한 반발심리로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과 교제도 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줄리아 역시 자신처럼 결혼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시도를 통해 ‘정상적’인 여성의 삶에 안착하려는 강한 욕구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내에게 느끼지 못했던 ‘여성을 사랑하는 정상적 남성의 기질’은 엉뚱하게 자신이 작전상 암살해야 하는 콰드리 교수의 와이프를 향해 솟아나고 그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다는 좌절감을 파괴욕으로 선회하는 과정이나 콰드리 부부의 암살이 실은 무의미한 작전이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은 마르첼로의 ‘정상성’에 대한 집착이 불러온 무수한 부작용을 말해준다. 소설은 끊임없이 ‘정상’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발견하려는 마르첼로의 시도로 가득하다.
신문에는 정상적인 삶이라곤 보이지 않았다.(94P)
정상적이고 전적으로 평범한 여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124P)
내가 그 손님들과 닮았나? (...) 그들과 공통점이 있는지 알고 싶어……(129P)
잠시 후 그녀는 내 아내가 될거야. (...) 이것이 정상이 되는 출발점이야.(209P)
정상성은 어떤 경험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경험을 평가하는 방식에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231p)
... 관료적인 정상성이 아니라, 거의 천사 같은 또 다른 종류의 정상성이었다. (306p)
이것이 정상성이었다. 즉 이 임시변통의 해결책과 공허한 형태가 정상성이었다. 그 밖에 모든 것이 혼란이자 무법 상태였다. (323p)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순응주의자>는 압도적인 미장센과 소설 속 대사의 재배치, 확연히 다른 결말부, 새로운 캐릭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모라비아의 큰 만족을 이끌어냈다. 오히려 소설 속에서 고해성사, 자백, 독백으로 서술된 마르첼로의 상황인식과 자기평가를 제 3자의 시선에서 잘 풀어내고 있다. 소설이 부담스러운 사람은 먼저 영화를 보는 것도 추천한다.
소설과 영화 모두를 관통한 시사점은 ‘정상’이다. 주인공 마르첼로의 비정상적인 기질들은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욕망에 약해 불륜을 일삼는 어머니와 의처증으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는가?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태도를 질책하고 벌주기를 바랐던, 교정받고자 하는 죄의식을 가졌던 어린 마르첼로를 돌보지 않은 가정환경에 있는가? 남성적 권력의 상징인 권총을 향한 강한 욕망을 불러일으킨 동급생들의 괴롭힘에 있는가?
마르첼로는 자신의 비정상적 기질의 출발점보다 그것을 정당화하고 가리기 급급해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미 종교의 바깥에 벗어나 있는 것 같은 불확실한 존재감에 시달린 어린 마르첼로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는 비정상적인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즉 자기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 분투하는 방식으로 보편가치에 순응하고 자신의 비정상적 기질에 나름의 이유를 만들어 정상화한다. 소설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 영화 속의 파시즘 동료, 장님과 장님들의 파티는 보고 깨닫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채로 제멋대로 춤추고 폭력을 휘두르는 마르첼로 내면의 자아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중성, 숨긴 기질, 아내에게 숨긴 신혼여행의 목적, 배신해야 하는 콰드리 부부 앞에서의 연기 등의 동시다발적인 진행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 인물들과 아이러니들, 그저 혼란 자체인 파리라는 도시에서 점차 회의에 빠져든다. 특히 영화에서는 간결하게 처리한 콰드리 교수의 부인과 마르첼로의 부인의 성적인 뉘앙스, 그들이 함께 춤을 추게 되는 댄스홀의 퀴어 설정은 그저 비기독교적 소재라는 점에서 거부감만을 드러내기에는 아까운 상징이다. 무엇보다 작가인 모라비아가 모럴리스트 작가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독재 파시즘의 냉혈의 딱딱하고 금욕적인 당시의 이탈리아와 물랑루즈와 성매매촌, 퀴어, 외국인과 온갖 지식들의 잡동사니인 채로 어지러운 파리의 대비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르첼로는 비정상적 경험 두 가지, 동성으로부터의 추행과 살해라는 가장 극단적인 경험을 덮어내기 위해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부에 순응하기로 한다. 퇴근 전까지는 목이 졸리듯이 꽉 맨 넥타이조차 다듬지 않는 그의 금욕적 태도는 한편으로는 대단한 윤리주의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성당과 종교에 대해 무던히 떠올리고 자책하면서도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지는 못하는 면을 보여준다. 상대론적 윤리주의의 모습을 일면 보여주고 있는 듯도 하다. 그가 추구하는 ‘정상성’의 모든 방법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사회는 많은 상대적 윤리강령과 다수결이라는 보편에 의거한 정상범주를 제시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트렌드와 유행이 빠르고 ‘요즘’의 주기가 세계 어떤 나라보다 빠르다. 모라비아가 그린 <순응주의자> 속의 파리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개체가 혼재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편에 서야 하는 것일까. 절대적인 율법에 의존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혼재된 세상의 흐름에 따른 상대적 윤리의 파도를 타야 하는 것인가.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파시즘적인 이탈리아의 ‘정상성’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비성상성’이 ‘정상성’으로 용인되는 파리의 세계관을 용인할 것인가.
마르첼로를 단순히 비겁한 순응주의로 남긴 영화와 달리 긴 에필로그를 통해 귀결시키고 있는 소설의 결말부는 그제야 ‘비정상성’의 원인에 다가간 그의 회의감과 슬픈 최후를 그려낸다. 그가 믿고 따른 정상화의 길이었던 정권이 무너지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해 낸 사건이라 생각했던 콰드리 부부의 암살사건이 불필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의 일이다.
그토록 시민들이 바라던 독재의 결말 뒤에 다시 국왕의 신호를 기다리는, 그저 흔들릴 뿐인 시민, 인간의 약한 기질을 목도하고 난 뒤의 일이다. 또한 자신이 그토록 정상화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최초의 치부, 살인이 미수였다는 것을 알고 난 뒤의 일이다.
이미 원죄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려 하는 숨가쁘고 헛된 열망이 정상이었다. (431p)
자기 삶의 원죄를 부적절한 방법으로 지우려 했던 것이었다. (397P)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정상성이라는 신기루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슬은 끊어졌고, 의무는 소멸되었으며,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되어 그 자유로 무엇을 할지 알게 되었다.(438P)
그에게 남은 것은 아내와 어린 딸이다. 그는 아내가 자신의 기밀작전을 알면서도 숨겨오며 애틋하게 가꿔온 가정의 모든 것을 돌아본다. 그들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파시스트를 몰아내는 전쟁을 피해 시골로 달려나간다. 잠시, 마르첼로는 하늘과 풀숲과 자신을 지탱해 준 가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하나님, 저들이 폭격을 맞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들은 죄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상대적으로 바라보기 쉽다. 진리를 알고 있는 교회는 ‘정상’이며 그렇지 않는 세상은 ‘비정상’이다. 이런 상대적 기독교 윤리관을 통해 만들어지는 순종은 순종이 아닌 순응에 불과할 것이다. 작가 모라비아는 금욕적이며 정상성을 획득하는 길로 보이는 규율적인 체제의 세계와 그렇지 않은 혼란한 세계 사이에 선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에게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허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어느 세계에 서 있든 인간의 기질적 문제는 원죄에서 온다는 것을 시사한다. 수많은 비정상성으로 보이는 극단적인 소재와 이야기를 읽으며 흥미롭기도, 괴롭기도, 의아하기도 한 많은 지점을 허투루 흘러 보내지 않기를 바란다. 더 깊이 파고들어 인간에 대해, ‘원죄를 가진 인간 전반의 정상’이라는 불완전한 형태를 인식하고 그것의 평범성과 함께 겸허한 마음으로 비정상적이라 인이 찍힌 사람들을 위해 ‘저들은 그런 죄는 없습니다. 구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마르첼로와 함께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순응주의자가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박창수 목사 (인천 성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