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친구는 안녕한가
(<당신 친구는 안녕한가>, 김기석, 두란노, 2023)
이 책은 목사님께서 서문에서 밝혔듯이, 시대를 고민하며 쓰신 짧은 글들의 모음이다. 저자를 설명하는 글에서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책은 시대를 바라보며 쓴 칼럼 모음으로, “우리가 써가는 삶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향이 빼곡히 담겨 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내 삶의 자리로 맞아들이는 환대는 이 시대를 고민하는 모든 주체들의 소명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일상에 깃든 하늘의 뜻을 내 삶의 자리에서 고민하게 한다.
신앙의 고갱이라 한다면 두 가지가 아닐까? 하나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무한 신뢰하며 그분 안에 머무는 것, 또 하나는 그 속(하나님 안에 머무름)에서 얻은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을 ‘나’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깃든 이웃들에게 흘려보내는 환대의 삶... 예수님은 이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생각을 ‘머무름’과 ‘함께함’이라는 두 그릇에 담아낸 것은 참 의미 있지 싶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머무름과 함께함은 서로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머문다는 것은 마음을 내어 줄 의지처가 생겼다는 것이고,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다는 것이다. 함께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시선이 머무는 것이고, 나의 길을 멈추어 그 시간, 그 공간, 그 이에게 오롯이 머문다는 것이다. 머무름과 함께함의 대상은 둘이 아니다. 성육신은 인간에게 머무시고자 했던, 인간과 함께하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었다. 이 사랑의 방식은 모든 관계에도 유효하다. 머무름 없이, 함께함 없이 사랑은 불가능하다. 서로 곁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에게 머무르기를, 그와 함께하기를 꺼리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면 그와 머물고 싶고, 그와 함께하고 싶다. 이성선 시인의 <다리>에서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제 앞길만 바라보고 휑하니 다리를 건너는 사람을 일컬어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는 자신 주변에 있는 이들을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효용을 따져 대상화하기 쉬운 사람이다. 그런 이들이 사는 세상은 삭막하다.
그러나 가다가 서고 먼 산도 바라보고 그러다 또 걷고, 그러다 또 쉬고... 쉬엄쉬엄 걸으며 주변을 살피며 걷는 사람은 다리의 고마움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고, 주변을 돌아보아 눈길을 줄 줄 아는 사람이다. 다리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러 있던 이가 바라본 세상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느릿느릿 걸으며 그의 시선에 담아낸 풍경은 아마도 그의 삶을 더욱 깊고 풍요롭게 해주었으리라. 그런 이들이 사는 세상은 따뜻하다.
우리의 시선을 더 근원적이고 깊은 차원으로 향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품이 넓은 사람이 되고 더 멀리 보는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깊은 신앙의 사람일수록 옹졸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닮아 누구든 받아들일 줄 아는 환대의 삶을 살게 된다.
이 책을 꿰고 있는 줄은 ‘환대’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적어도 시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마땅히 어떠해야 할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내 삶의 자리로 맞아들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인 동시에 정의이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을 환대의 세상으로 바꾸는 것, 탐욕에 이끌리던 삶을 나눔과 절제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 고립의 세상에서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고민하는 모든 주체들의 주어진 소명이다. (서문)
머무름과 함께함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이들에게 머물고 싶어하고 함께 하고 싶어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 함께 해야 할 이는 지금 이 순간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몸소 가르쳐주셨다. 내가 지금 예수의 길을 잘 걷고 있는가? 그것을 알려면 난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고,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가슴에는 멍이 가실 날이 없다. 세상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없다. 온 세상이 그분의 몸이기 때문이다. (53)
저자는 여러 글을 통해 그리스도인 됨에 대하여 ‘누군가의 품이 되어주는 것’이라 말해왔다. 이것만큼 명징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가 있을까? 본회퍼 목사님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타자를 위한 존재’ 이는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사람을 규정하는 정의이기도 하다. 우린 이렇듯 누군가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을까?
이 혁 목사(의성서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