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의가 정의를 살해하는 오랜 수법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서제인 역, 엘리, 2023)
홀로코스트를 기록한 유대인의 책들을 읽다보면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첫째는 비극의 역사를 끈질기게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작가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것처럼 ‘유대인의 힘은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음’에서 난다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팔레스타인을 대하는 유대인의 이중성에 대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 피해자로 살아왔음을 강변하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잔인한 가해자가 되니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프로테스탄트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을 “또” 읽는 것은 탐탁치 않은 면이 있습니다. 비극의 역사를 끈질기게 기억하는 유대인의 노력이 존경스러우면서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외면하는 태도가 거북한 것도 사실입니다.
데어라 혼의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를 읽는 것도 이런 경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프로테스탄트의 한 사람으로서 데어라 혼의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기독교는 신정론의 문제에 봉착하면서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직도 교회 현장에서는 축복을 선포하는 목회자와 불행을 경험하는 성도 사이에 발생하는 괴리를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데어라 혼은 신정론 문제가 발생한 정치-종교적 원인을 날카롭고 명쾌하게 분석합니다. 책을 읽어가다보면 수면 위에 비친 구름처럼 그 해법이 아른거리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책을 읽으며 스스로 발견해가는 즐거움을 만끽할 독자들을 위해 말을 아끼겠습니다. 뻔한 것 같지만 뻔하지 않은 무엇을 발견하리라 믿습니다.
다만 이 책에 등장하는 배리언 프라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만 조금 해볼까 합니다. 아우슈비츠로 향하던 1200명의 유대인을 구한 쉰들러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배리언 프라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배리언 프라이는 1940년과 1941년 사이 13개월 동안 대략 2000명의 유대인을 구하는 데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가 구한 사람들 명단에는 한나 아렌트, 마르셀 뒤샹, 마르크 샤갈, 막스 에른스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앙드레 브르통 같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발터 벤야민은 프라이의 도움으로 피레네 사맥을 넘었으나 스페인 군인에게 발각될 것이 두려워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외에도 2000명에 달하는 유럽의 유대계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프라이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피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그가 도미시킨 유대계 천재들로 인해 지식과 문화의 부흥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업적에 비해 배리언 프라이는 너무나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프라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유대계 지식인들 조차 그를 언급하거나 감사를 표한 일이 없습니다.
데어라 혼은 배리언 프라이 같은 ‘정의로운 비유대인’이 무명에 묻힌 이유를 추적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 정부의 “의도적인” 지우기와 구원받은 지식인들의 “의도적인” 외면이 원인이었습니다.
일단, 구원받은 천재들은 미국에 와서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에게 프라이와 함께 했던 시간은 살기 위해 목숨을 구걸했던 가장 치욕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입장에서 프라이는 치욕적인 기억을 소환하는 이름이었고, 치욕적인 기억을 외면하고 싶었던 만큼 프라이를 외면했습니다.
미국 정부에게 프라이는 더욱 불편한 일물이었습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까지 미국 정부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묵인 또는 방조했습니다. 미국의 많은 지식인과 관료, 대학들이 나치의 성공과 우생학에 동조했고, 나치와 타협하고 협력할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프라이는 1935년부터 나치에 대한 우려와 만행을 고발하고, 프랑스가 나치 수중에 들어가자 유대계 지식인들을 구하기 위해 마르세유로 날아갔습니다.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프라이는 나치의 만행을 묵인-방조했던 과거를 들춰내는 존재였습니다. 미국은 정의롭지 못했던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하기 위해 정의로운 한 사람을 지우기로 합니다.
미국 정부가 됐건, 구원받은 천재 유대인이 됐건, 프라이가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이 좋은 빌미였습니다. 그의 괴팍한 성격을 들춰내고, 원만하지 못한 가정 생활을 들춰내고, 왜 더 많은 유대인을 구하지 못했는가, 왜 당신은 지식인만 구하고 평범한 사람은 외면했는가를 묻는 것 만으로도 그를 끌어내려 묻어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정의로운 사람에게 왜 더욱 정의롭지 못했는지를 묻고, 인간적인 결함을 파해쳐 그의 업적 모두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 정당한가? 배리언 프라이라는 인물을 통해 불의가 정의를 살해하는 오랜 수법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정의로움은 특별하지 않은 것, 진부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의로움이 그것의 본질인 예언으로 여겨지는 법은 없다.”
우동혁 목사 (만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