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소하고 따뜻하고 분명한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정은귀 역, 민음사, 2021)
1904년, 프란츠 카프카는 자신의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이처럼 카프카는 자기 자신을 찌르고 상처를 줄 수 있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만약 자기 자신이 얼어붙은 바다 위에 서 있었다면? 그래서 도끼가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순 순간 자신도 바다 속으로 빠진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위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다. 이번 학기에 공부했던 신학과 철학은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었지만, 때때로 그 전달 방식은 내게 매우 냉정하고 거칠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내 마음을 깨부수며 내게 상처를 입혔다. 이럴 때 내게 가장 좋은 방법은 잠시 눈을 돌려 다른 분야의 책을 읽는 것 혹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학기 중이었기 때문에 신학과 철학 이외의 책을 읽을 수도 없었고 혼자만의 휴식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상처를 치료하지 못한 채 점점 바다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없이 가라앉고 있을 때, 문득 작년 말에 봤던 짐 라무쉬 감독의 <패터슨>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에는 특별한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고 특별한 내용도 없다. ‘패터슨’이란 도시에 사는 ‘패터슨’이란 인물이 버스를 운전하면서 시를 쓰는 내용이다. 하지만 작년의 나는 그 영화를 보는 동안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꼈다. ‘그래, 어쩌면 그 영화를 한 번 더 본다면 지금의 상처가 아물지도 모르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영화 <패터슨>을 검색했다.
영화를 검색하다가 주인공 ‘패터슨’의 모티브가 미국의 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와 <패터슨>이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문득 영화 속 모티브의 시인은 과연 어떤 시를 썼을까? 이 시인도 따뜻함을 지니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영화를 보는 대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 그의 시집 두 권을 샀다.
영화 <패터슨>에서 ’패터슨‘은 “시를 번역하는 것은 우비를 입고 샤워를 하는 것과 같다”는 대사를 한다. 그러니까 번역된 시를 읽는다는 것 또한 우비를 입고 샤워를 하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번역된 외국 시를 읽다 보면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대체 이게 왜 좋다는 것이지?’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 많다.
솔직히 말하면,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언어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시를 읽는 동안 이해하지는 못해도 알 수 없는 따스함을 느꼈다. 마치 영화 <패터슨>을 보듯이 시를 읽는 내내 따스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윌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두 시집을 번역한 정은귀는 <패터슨>의 작품 해설 제목을 “사소하고 따뜻하고 분명한 ‘접촉’”이라고 말했다. 아마 이보다 더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는 왜 따뜻한가? 그의 시에는 화려하거나 예쁘게 보이기 위해 기교를 부린 문장도 없고 특별한 내용도 없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정은귀 번역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리 무섭고 끔찍하고 비루한 것이라 해도 눈을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미화하지 않고. 현실의 가난과 비참을 넘어서는 아름다움, 새로움을 상상하는 힘 또한 거기서 나온다.”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 397)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는 현실이 아무리 비루하더라도 그곳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거대한 것들을 보지 않고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것들을 바라보았다. 아픈 곳을 예쁘게 가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아픈 곳을 드러내고 직시하게 했다. 쉽게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를 미화하지 않고 보았다. 그 대신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소하고 따뜻하고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는 따뜻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사소하고 따뜻하고 분명하게’ 바라보는 자의 관점에서 쓰인 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보다 세상을 사소하고 따뜻하고 분명하게 바라봤던,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에 따뜻하고 분명하게 접촉했던 사람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 차별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사소하고 따뜻하고 분명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오늘 나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라고 하면서 ‘거대하고 차갑고 모호한’ 삶을 살지는 않았던가? 신학과 철학을 배운다는 핑계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요즘 나는 ‘사소하고 따뜻하고 분명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누군가가 나의 눈빛과 말과 삶을 통해 따스함을 느낄 수 있기를, 교회의 아이들에게 공허한 설교를 전하는 사역자가 아니라 언제나 따스했던 예수님을 전달하는 사역자가 되기를 바라며.
김윤형(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