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야고보서를 읽다
(<인생 야고보서를 읽다>, 데이비드 깁슨, 복있는 사람)
야고보서는 당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소중히 여겼고 모세의 율법을 훤히 알았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됨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우리가 보았듯이, 야고보는 온갖 분파로 갈라진 가운데 내부의 균열을 드러내는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들은 온전한 마음 대신 나누어진 마음을 갖고 있다. 그들은 아직 완전하거나 온전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따끔한 살균제 같은 야고보서를 읽고 있다. 이 편지는 곧 우리의 영적 체제에 항생제처럼 주입되어 질병을 찾아내고 그 뿌리부터 근절해낼 것이다.
곧이어 야고보는 자신의 목표는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위해 마련하신 목표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 목표란 곧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완전한 도덕적 고결함에 미치지 못한다면, 죄로부나 완전히 동떨어져 계신, 스스로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야고보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우리는 긍휼이 필요한 사람에게 얼마나 긍휼을 베풀었는가? 가난한 자,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 우리는 그에게 관심과 시간, 보살핌, 사랑, 무엇보다 긍휼을 베풀었는가?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는가? 대체 우리는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야고보가 제시하는 복음의학에서 가장 도전적인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하실지 명확히 볼 때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영광의 안경을 끼고 판단한다. 저 남자는 고상해 보인다. 저 여자는 나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비에 근거하여 판단하신다.
짐작컨대, 긍휼을 베풀기 매우 힘든 어떤 사람이 우리집에 얼굴을 내밀 수도 있다. 어쩌면 긍휼을 베푸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려고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원할까요?” 의사 야고보는 이렇게 묻는다. “오 약간의 정의입니다. 하나님, 정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제가 여기 왔습니다. 이곳에 오게 되어 기쁩니다!”
아니다. 나는 마지막에 우리가 정의를 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분의 긍휼이 없다면,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라고 야고보는 아주 분명하고, 그래서 사랑을 담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의 말을 바꾸고 여러분의 행동을 바꾸라. 이제 그렇게 하자. 바로 오늘, 우리 함께 행동을 바꾸자.
신성완 전도사 (아름다운교회 작은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