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학에 초월의 맥락은 없는가?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5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 3가지 책들은 유발 하라리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저서다. 마치 칸트의 3대 비판서와 같이 유발 하라리의 3대 서적은 현대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사피엔스는 과거를 다루고, 호모 데우스는 미래를 다루며, 21가지 제언은 21세기를 위한 것이라 현재를 다룬다. 그의 책은 여전히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에 올라가 있고 독서모임에서 꾸준하게 언급된다.
유발 하라리가 주는 통찰력은 굉장하다. 상상 속의 실재라는 개념을 통해서 호모 사피엔스가 모든 종 위에 군림할 수 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사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이 완전 새로운 내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국가의 개념, 종의 개념들이 단순히 이름에 가깝다는 주장은 사실상 유명론의 입장이다. 그렇기에 그가 주장한 것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큰 통찰력을 주는 이유는 단순히 이름이라 여길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용’이라는 것도, 과학의 ‘진보’도 사실 상상 속의 실재다.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우리는 신용을 가지고 경제생활을 하고 있다. 신용이라는 것은 사실 타인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이지만 자본주의는 이러한 없는 것을 있다고 상정하고 이것을 가지고 모든 호모 사피엔스가 단합한다. 신기하게도 종교는 분열의 역사를 겪고 굉장히 개인적으로 변화하였지만 유일하게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신용이다. 그런 점에서 하비 콕스가 신이 된 시장이라 말한 것이 마냥 그의 주장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없는 것이지만 있다고 여기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허구인 상상이지만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유명론적인 개념을 단순히 철학적 의미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가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이유로 여긴다는 것은 분명 참신하고 새로운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학의 한계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편견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인류학에는 초월의 맥락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종교와 신앙, 신용, 신뢰 기타 등등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상상력의 맥락은 여전히 진화생물학적인 관점이 짙게 나타난다. 즉, 종교라는 상상력을 통해서 호모 사피엔스가 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종에 비해서 쉽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유발 하라리가 범하고 있는 가장 특징적인 오류는 진화생물학과 같이 어떤 한 요소로 전체를 판단하고자 한 환원주의다.
상상력이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좋은 요소라고 한다면, 인간의 모든 형이상학적인 사유는 상상력이라는 단어 하나로 갇히게 된다. 물론 이것이 인류학이나 인간학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에 대해 긍정하고 동의하는 것을 본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유발 하라리만의 주장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알겠지만 신앙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상상력으로 말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앞서 말한 신앙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환원주의 태도는 신앙에 대한 초월의 개념을 지운 채 지극히 인간의 입맛에 맞춘 해석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좀 바라보고 싶다. 그가 주장하는 종교 안에 존재하는 신학적인 본질은 어떻게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서는가? 인간이 단순히 커다란 단백질의 구성합이 아니라면 그 안에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면 마찬가지로 종교도 단순히 상상력이 아니라 그 너머, 초월의 의미를 지녀야 함은 분명하다.
이경우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