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직임이라는 언어
<피나 바우쉬, 끝나지 않은 몸짓>, 마리온 마이어 지음. 을유문화사
때때로 우리의 일상 자체가 지상을 무대로 하는 큰 공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평범한 동작이나 대사들이 갑자기 뇌리에 박히고 명화나 영화의 장면으로 오래 남아 오묘한 감동을 선사 한다. 이를테면 뜨신 밥의 김을 맞으며 밥그릇을 고쳐 쥐는 손의 움직임이나 출근에 대한 스트레스와 습관적 걸음, 한탄이 피어오르는 잠에 덜 깬 걸음들, 씻은 손의 물기를 터는 움직임에서 갑자기 어떤 감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창조된 자연 속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흐르는 계곡물, 쉴 새 없이 반복해서 밀려 왔다 매번 다른 물방울을 튀기고 다시 밀려가는 파도의 움직임에서 수려한 춤의 감흥을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다만 사심 없이 흔들리는 자연이나 의도된 아름다운 춤동작보다 일상의 몸짓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언어이이기 때문이다. 말이 통하지 않은 동물이나 언어를 모르는 어린 아이의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것과 같이 말이다.
“무대 위의 사람들을 인격체로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저 무용수만이 아니라요. 그건 작품들을 방해할 거예요. 나는 그들이 인간으로 바라봐졌으면 좋겠습니다. 춤추는 인간으로.”
또한 춤을 통해서 테크닉과 멋이 아니라 인간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독일 부퍼탈의 탄츠 테아터Tanztheater를 창설한 피나 바우쉬가 작품을 만들었던 방식처럼.
무용가, 안무가의 평전은 좀처럼 관심조차 가지 않는 종류의 책이다. 어릴 적에는 위인전을 많이 읽었다. 박지성 같은 축구선수도 위인전으로 출판된다는 소식에 놀란 것도 한 때, 요즈음에는 인물에 대한 평전을 읽을 기회가 많지 않다. 더군다나 무용가를 회고하는 것은, 동적인 그들의 작품과 생애의 업적과 대비해 너무나 단조롭기 짝이 없는 문자로 적힌 평전의 형태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피나 바우쉬는 작품 뿐 아니라 그녀의 관점, 작품의 담긴 메시지와 작업 방식을 아는 것 역시 큰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작품 <콘탁트호프Kontakthof>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피나 바우쉬의 댄싱드림즈>가 먼저 떠올랐다. 65세 이상의 비전문가 무용수와 14세 이하의 비전문가 청소년, 두 그룹으로 무대를 완성한 내용을 담은 영화는 피나 바우쉬가 인간을 다루고 인식하고 구현해 나가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려주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인간다움이다.
“근심에는 희망이 포함되고 상실에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이 속하죠. 나는 사람들이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관건은 우리가 왜 무엇인가를 하는지, 그 동기입니다. 내 생각으로 그들은 둘 다 인간에 관해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게 전통인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사람들이 이해했다는 걸 알아챌 때면 기쁘답니다. 하지만 아무에 대한 평가는, 그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문제는 인간다움이에요.”
그 외에도 <물>, <보름달>,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아이들을 위하여>, <카페 뮐러>, <산에서 통곡소리 들리나니>, <……들에 낀 이끼처럼, 아,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와 같은 명작을 만든 그녀의 작품은 다소 과격하고 극단적이며 반복적이지만 동시에 동화적이고 명백한 카타르시스로 향하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오늘날 연극, 무용에 피나 바우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춤. 대사, 몸짓, 음악, 이미지 등 모든 감각과 표현의 합을 통해 언어로 말할 수 없지만 반드시 말해야 하는 것들을 표현한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이 구체적으로 서술된 중간 부분과 도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평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녀가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다. 바로 ‘질문’이다. 한 작품 당 무용수들에게 150개 가량의 질문을 던진다는 피나 바우쉬에 대해서 오랫동안 함께 한 무용수들은 마치 학생같이 빈 노트와 펜을 들고 질문에 대해 상상하고 연상하고 답하며 작품을 함께 만들어 나간 경험들을 들려준다. 이 ‘질문하기’로 작업해 나가는 방식은 놀랍고 또 대단히 개방적이다. 우리는 대답하는 자를 찾기에 급급하지만 성장해갈수록 많은 순간 더 중요한 것은 질문들이다. 특히 종교는 늘 답을 찾는 이들의 방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 무엇을 결정하고 어떤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하나님이 욥에게 끊임없이 질문하셨던 것처럼, 곳곳에서 질문으로 대답하신 것처럼 중요한 것은 미래를 결정짓는 폐쇄적인 대답이 아니라 개방하여 자유롭게 걸어 나갈 수 있는 질문들이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우리는 도대체 이 시대에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지? 우리에게 무엇이 이로울까? 더 웃는 게 적절할까? 아니면 더 슬픈 게? 나는 내 팀에게 묻는답니다. 우리는 서로 어떻게 마주치지?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가지? 우리는 무엇인가를 어떻게 파악하지?”
의외로 질문이 몸짓으로 표현되는 방식은 설득과 이해가 더 쉽다. 바디 랭귀지가 만국 공통어인 것처럼 움직임이라는 언어는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질문의 답들을 파도처럼 밀어내고 밀려나게 한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을 한 편도 보지 않았어도 괜찮다. 이름을 처음 들어보아도 괜찮다. 2009년에 운명을 달리하고 많은 이들에게 질문이 된 그녀의 작품과 작업 방식, 삶에 대한 몇 개의 회고들을 통해서 움직임, 춤, 질문,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힌트를 얻기를 바란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작품이 영상화된 것이 별로 없어 책에서 촉발된 호기심을 충족하기는 어렵지만 빔 벤더스 감독이 만든 영상 회고적 영화 <피나Pina>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영화와 책을 함께 보기를 추천한다.
박창수 목사 (인천 성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