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긴밤
<긴긴밤>, 루리 글·그림, 문학동네, 2021
동화는 이름 없는 어린 펭귄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에게 이름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아버지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나의 아버지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들, 작은 알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이야기이다.”
동화 <긴긴밤>은 버려진 작은 생명을 곁에서 지켜주고, 그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려고 온 생애를 걸었던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땅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런 이들만 가득한 세상이라면 세상은 벌써 지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이만큼 살만한 것은 누군가의 생명을 떠받치려 자신의 온 생애를 내던진 고마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내 삶이 이어지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관심과 애정과 손길이 수없이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여 동화 <긴긴밤>은 멋지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백마 타고 온 영웅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에 오밀조밀하게 엮여 있으면서 서로의 생명을 북돋아 주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 우리 곁의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 생명을 살리고자 긴긴밤을 지새우며 애태우는 이들이 있다. 함께함의 가치를 아는 이들의 삶은 세상을 훈훈히 데우는 장작과 같다. 이들이 있어 세상은 따뜻하다.
동화 속 긴긴밤은 아픔과 고뇌의 시간임과 동시에 사연 많은 가녀린 생명들이 서로 의지해 상대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던 소통의 시간이기도 했다. 긴긴밤은 철저한 외로움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외로움과 외로움이 만나 서로를 채워가며 꿈이 영글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외롭고 힘겨운 긴긴밤이 있다. 이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한숨과 절망으로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일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한숨짓고 눈물 흘리는 이의 삶을 끌어안고 그가 굳건히 일어서도록 안간힘을 쓰는 격려와 위로의 밤일 수도 있다. 저마다 애달프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면서 외로움에 지쳐갈 때 ‘너 하나 있으니’(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중에서)하며 다시금 힘을 내어 일어설 수 있는 고난의 연대, 사랑의 연대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잘 산다는 것은 이름 하나 세상에 남기는 데에 있지 않다. 새끼 펭귄은 노든과의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 때 나중에 수많은 펭귄 중에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이름을 지어달라 하지만 노든은 끝내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그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노든은 이렇게 말할 뿐이다.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 ...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99)
수많은 긴긴밤을 함께 보냈기에 그의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 봐도 그의 기분이 어떤지,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으리라.
난 지금 그의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 봐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을까?
이 혁 목사(의성서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