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에게 사랑받았습니까?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가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습니까?
(<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권남희, 문학동네, 2010)
“죽은 자들은 자신을 애도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618)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은 시즈토라 이름하는 ‘애도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죽은 장소를 방문한다. 거기서 한 발로 무릎을 꿇고, 한 손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다른 한 손은 바닥에 닿을랑말랑 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에게 애도란 “돌아가신 분을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기억”하는 것이다.(165)
20대 초반, 한 친구가 군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무더운 여름 날, 훈련소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더라. 친구들과 함께 빈소를 방문해 조문했다. 고인의 아버지께서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씀을 남기셨다. “OO이를 오래 기억해달라.”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고인을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기억해달라는 요청을 받기 마련이다.
어느 유명만화에서 회자되는 명대사 중 하나는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냐? … 다른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다”이다.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코코>에서도 비슷한 설정이 등장한다. 후손들에게 이름이 잊혀지면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 그 존재가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애도와 추모만큼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일은 그토록 귀중하다.
소설 <애도하는 사람>은 주인공의 괴이한 행동을 추적하는 구조를 지닌다. 시즈토가 어째서 자신과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들을 애도하며 전국을 유랑했는지, 책을 덮고 나면 납득하지 않을 독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특히, 한 청소년의 죽음을 애도할 때, 유가족들과 우연히 조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고인은 쉽게 욱하는 성격에, 절도죄와 방화미수로 소년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오보였다. 죽은 학생의 부모는 진실도 모르는 채로 어찌 명복을 비냐고 성화를 내며, 절박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본래 아이는 선천적 지적장애이며, 집단 괴롭힘으로 인해 죽었다고. 덩치 큰 가해자가 샌드백 삼아 아이를 때리다가, 아이는 견디지 못해 도주했으나 바로 붙잡혀 넘어지고, 발로 수십 대를 얻어맞고 그대로 방치되어 사망했다고.
이윽고 아이의 부모는 시즈토에게 감사인사를 전한다. 그들은 매달 자식이 죽은 날짜에 꽃을 놓고 오는데, 아무도 마주친 적이 없다고, 처음으로 당신이 아이를 위해 손을 모았다고. 고맙다고. 이내 앞으로도 기억해달라고 간청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애도하는 행위는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
고무적인 것은, 우리 사회의 추모문화가 잘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타자의 죽음에 슬퍼할 줄 아는 것은 지성인의 제일 덕목이 아닐까 싶다. “신의 심판이라느니”, 정죄나 판단은 유보해야 한다. 때이른 죽음을 당한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편, 그들의 죽음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여지가 많아 유감인데, 그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취약하고 병들었는지, 시급하게 수선해야 할 부분을 온 몸으로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기실, 소설 <애도하는 사람>은 그런 사회구조적 병폐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누군가를 대체불가능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우쳐준다. 애도하는 사람 시즈코가 집요하게 물은 것은, 살아생전에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에게 사랑을 받았고, 또 누구에게 감사인사를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은 타자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그 소소함이 구원이 될 때가 있다. 함부로 사랑하자.
김민호 목사 (지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