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문학동네, 2014)
열두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대성당>의 표제작 ‘대성당’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와이프의 친구인 한 남자가 ‘나’의 집에 놀러온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를 반기지 않는데, 그가 유색인종이자 맹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종일관 맹인에게 무례하게 행동한다. 그러다 두 사람은 TV에서 대성당에 관해 설명하는 방송을 듣게 된다. 맹인은 ‘나’에게 대성당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나’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자 맹인은 ‘나’에게 대성당을 함께 그려보자고 한다. 그렇게 둘은 서로 손을 잡고 대성당을 그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It’s really something)라고 말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 읽었을 때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싶었다. 그래서 해설을 찾아보니 대부분 ‘대성당’의 이야기를 ‘나’가 갖고 있던 편견이 깨지면서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해석하였다.
해설을 읽고 나니 이번에는 주제와 메시지에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을 이해할 수 없지 않은가?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혐오와 차별이 만연해있지 않은가? 나는 이러한 의문들이 들었고 카버의 이야기는 그저 이상적인 이야기로만 여겼다. 하지만 나는 작년에 ‘대성당’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그 경험을 조금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난 2021년 12월부터 2022년 6월까지, 친구와 함께 경기도 양평에 있는 “캠프힐 마을”이라는 발달장애인 생활공동체에서 일을 하며 지냈다. “내가 캠프힐 마을에서 일을 했던 건 평소 장애에 대해서, 장애인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라고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부끄럽게도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프힐 마을에서 일을 했던 건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A선배가 캠프힐 마을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선배는 나와 친구에게 “함께 일하면서 지내보지 않을래?”라고 제안했고, 나는 그 제안을 단번에 수락하였다.
하지만 캠프힐 마을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도, 먼저 인사하고 다가가도 그곳에서 사는 발달장애인들은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처럼 겉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2022년 1월의 어느 날, 캠프힐 마을에서 생활하는 막내가 저녁을 먹고 난 뒤 내게 내 패딩을 건네주었다. 처음으로 먼저 다가온 막내의 행동에 나도 드디어 이곳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과 ‘나에게도 드디어 마음을 열어주었구나’하는 기쁨이 몰려왔다. 나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내가 추울까봐 패딩 주는구나!”라고 말하며 바로 패딩을 입었다.
그런데 내가 패딩을 입자 막내는 내 가방도 내게 건네주었다. ‘가방은 왜 주는 거지? 지금 나랑 무슨 놀이하는 건가?’ 의아했지만 일단 가방도 메었다. 그러자 막내는 씨익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가.”
나는 뜬금없이 이별 통보를 받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응?”이라고 되물었다. 이런 내 반응에 막내는 다시 한번 웃으면서 말했다.
“나가.”
결국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숙소에서 추방당했다. 갈 곳이 없었기에 A선배를 급하게 불렀고, A선배와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막내가 잠든 뒤에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길래 막내는 나를 쫓아낸 걸까? 나는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데 왜 그들은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나는 이 문제의 해답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이유나’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은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수화를 사용한다. 수화를 사용하기에 스크린에는 자막이 뜨지만, 내 눈은 왠지 모르게 자막 대신 ‘이유나’의 눈빛과 손짓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수화를 모르기에 ‘이유나’의 수화를 하나도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 ‘이유나’의 수화가 이해할 수 있었던 다른 인물들의 대사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다른 인물보다 ‘이유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영화를 몇 번 더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단순히 ‘언어’를 주고받는 것만이 의사소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언어뿐만 아니라 눈빛과 표정, 행동을 주의 깊게 볼 때 그 사람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캠프힐 마을에 사는 발달장애인들의 눈빛과 표정을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그들은 더 이상 ‘발달장애인들’이 아니게 되었다. 각자 고유한 개성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 내 앞에 드러났다. A가 좋아하는 노래를, B가 좋아하는 음식과 캐릭터를, C가 어떤 상황을 싫어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마치는 날까지 나는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함께 웃으며 밥을 먹었고, 눈썰매를 탔고, 연극을 봤고, 운동을 했다. 이 경험은 ‘대성당’의 ‘나’가 말했던 것처럼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It’s really something)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사랑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대성당’의 주인공처럼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It’s really something)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떠한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충만함을 경험한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김윤형(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