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탕자의 귀향
<탕자의 귀향- 집으로 돌아가는 멀고도 가까운 길>
헨리 나우웬 저, 최종훈 역, 포이에마(2009)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그림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어깨에 올려진 부모의 손(오른손은 어머니의 손, 왼손은 아버지의 손처럼 묘사함)이 인상깊은 그림이지요.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을 묵상하며 자신의 영적 여정을 돌아봅니다. 작은 아들, 큰 아들로서 아버지의 집에서 달아났던 자신의 모습을 기술하면서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 모두는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받았음을 기억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주 잘 알고 있던 성경의 비유이지만, 헨리 나우웬의 묵상과 자기 고백에서 새삼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과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소명에 따라 살 수 있을까요?
먼저 헨리 나우웬은 작은 아들로서의 자신을 돌아봅니다. 실제로 이 비유를 읽을 때 많은 이들은 자신을 작은 아들로 보곤 합니다. 방황하고, 신의 품에서 벗어나고, 제 멋대로 살기를 원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말입니다. 내면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세파에 휩쓸려버린 모습. 그러면서도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모습. 인생이 망가져버린 것 같은 느낌들. 낯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들은 참 용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을 죽음에 놔두지 않고 아버지 집으로 기어이 돌아갔으니까요. 자기 신분을 회복할 수 있을거라 기대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이 살 수 있는 방법임을 믿었을테니, 아버지가 나를 내쫓지는 않을거라는 신뢰가 있었을테니 돌아갈 수 있었을 겁니다.
집은 "사랑하는 아이야, 네게 은혜를 베풀어주마"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내 존재의 중심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시 23:4)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앓는 사람을 고쳐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마 10:8) 내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거절당할까 걱정하거나 인정받는 데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게 잘못을 지적하며, 위로하고, 훈계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72)
그러나 내 마음을 울린건 '큰 아들'에 대한 묵상이었습니다. 작은 아들보다는 큰 아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 더 쉬웠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나에게 가장 먼저 올라오는 감정은 '억울함' 혹은 '시기심', 바로 큰 아들의 감정이었습니다. 나를 인정해 줄 외부의 누군가를 찾고, 나의 수고에 대한 칭찬에 갈급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착취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고, 다른 이와의 비교에 분노할 때도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나와 같은 감정을 경험하고, 때로 괴로워한다는 구절을 읽었을 때 퍽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도 작은 아들처럼 신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탕자라는 것, 다시 말해 큰 아들 또한 신이 간절히 찾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과거의 어떤 일이 나를 괴롭게 할지라도, 억울하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신의 사랑과 관심은 끊임없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머리로 깨닫고 난 후, 바로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간절히 찾고 있다는 걸 알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고 싶습니다. 아, 편히 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자기 부정과 자기 비하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더불어 기쁨의 축제에 참여한다는 건 얼마나 꿈같은 일인지.
퍼뜩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질투, 분노, 과민하고 완고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묘한 독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불평을 입에 달고 지냈는지, 얼마나 적대감에 찌든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살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러고도 어떻게 그처럼 오래도록 자신을 작은아들로 여길 수 있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나는 분명히 큰아들이었지만 동생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평생 '집'을 떠나지 않았을지라도 길을 잃고 방황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44)
큰아들의 상실감과 작은아들의 방황을 삶에서 모두 체험했던 작가는 만년에 <탕자의 귀향>을 그리면서 두 아들을 모두 화폭에 올렸습니다. 둘 다 치유와 용서가 필요했습니다. 둘 다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둘 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용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회심을 찾자면 아무래도 집에 머물고 있는 이가 돌이키는 경우를 꼽아야 할 겁니다. (121)
원망과 감사 사이에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에게 나타나셔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권하십니다.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어둠에 남아 처지가 더 나아보이는 이를 가리키며 지난날 아픔을 가져다주었던 갖가지 불행한 사건들을 탓하면서 원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 있는 건 아닙니다. 나를 찾아오신 분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내 존재와 소유 전체가 순전히 선물임을 깨닫고 깊이 감사하는 길도 열려 있습니다. (158)
그리고 헨리 나우웬은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받았음을 자각합니다. 선교사로, 목회자로서 살아가려는 나에게 이보다 더 큰 도전은 없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 용서받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듯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의 용서'란 시작일 뿐이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런데 나도 누군가로부터 케어받기를, 챙김받기를 기대하고 있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은 엄두가 나지를 않더군요.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용서해야 할 대상이 눈 앞에 있는데, 보류합니다. 이것이 지금 내 상태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말했듯,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전제로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먼저 내가 사랑받고 용납받는 존재라는 것을 충분히 누리는 것 부터가 시작일테니까요. 신의 품 안에 거하며 충분히 쉬는 것, 그것이 어떤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 감각을 끄집어내는 훈련을 먼저 해보려 합니다. 지금 내게 무엇보다 필요한건 그 감각을 찾는 일입니다.
- 정유은 목사 (꿈이있는교회, L국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