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과 무엇이 다른가.
<양치는 언덕>, 미우라아야꼬, 서치현 옮김, 소담 출판사, 2001
“루오의 <그리스도>를 보니까 무언가 가슴에 부딪혀 오는 게 있더군. 비애라고나 할까? 그 <그리스도>와 내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지. (중략) 아픔이라고 할까, 연민이라고 할까? 저 루오의 <그리스도>는 ……. 그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깊은 위로를 느끼게 돼. (중략) 이 깊은 위로를 주는 그리스도와 나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게 아니다, 하고 자꾸만 생각하게 돼.”
꽃샘추위와 함께 사순절에 접어드는 시기가 되면 십자가상(crucifixion) 예수 명화를 찾아보게 된다. 루벤스, 벨라스케스, 지오토 등 유명한 십자가상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도 좋지만 결국 루오의 그리스도 그림을 한참이나 살펴보게 된다. 매년 루오의 그림을 깊이 감상하도록 나를 이끈 책, 미우라 아야꼬의 <양치는 언덕> 덕분이다.
<빙점>으로 잘 알려진 미우라 아야꼬의 작품은 통속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사랑과 용서, 그리고 신앙을 잘 녹여내어 어쩌면 막장 드라마 같은 우리네의 일상 삶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 신앙을 적용해야 하는지 가장 근접하게 잘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많다.
<양치는 언덕>의 등장인물들도 그러하다. 서로 얽히고 얽혀 살아가면서 미워하기도, 난처해하기도, 회피하기고, 욕망하기도 하면서 짓는 많은 죄의 연속이다. 친구, 연인, 불륜, 부모와 자식 간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사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람의 사랑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하며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한다. 고교 동창인 나오미, 교오꼬, 데루꼬의 얇은 우정과 질투, 친부의 내연녀가 교오꼬의 어머니란 사실에 고통스러운 학창시절을 보냈음에도 끝내 교오꼬의 친오빠인 료이찌와 불륜을 저지르게 되는 데루꼬, 나오미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을 오랫동안 좋아해 온 교오꼬를 내치지 못한 스승 다께야마의 숨겨진 사랑, 여자와 술이 가장 필요히 여기는 료이찌의 가볍고도 방탕한 사랑, 료이찌가 어떤 인간인 줄 알면서도 친구이기 때문에 나오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다께야마의 우정 등 좁은 인간관계 내에서 복잡하고 다양한 사랑의 형태들이 붉게, 검게, 푸르게, 창백하게 우후죽순으로 자란다.
그 가운데서 나오미와 료이찌의 사랑은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목사의 딸로 흔히 ‘못된 신앙’이 된다는 모태신앙자인 나오미의 어린 치기로 부지불식간에 살림을 합치게 되어버린 료이찌는 좋은 남편이 아니다. 남편 이전에 좋은 남자나 사람이지 않다. 여러 여자 친구들을 사귀면서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술에 취해 극적인 영감만을 바라는 화가인 료이찌를 나오미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솔직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라고 크게 착각한다.
“네가 말하는 자기 충실이란 감정에 충실한 걸 말하는 거니?.” “그래요.” “자기 안에는 감정만 전부인 듯한 말투구나. 자기의 의지나 이성이나 신앙에 충실한 것도 자기에게 충실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는 것이 제일 순수하다고 생각해요.”
“울고 싶으니까 울고, 웃고 싶으니까 웃는다면 마치 어린애와 같잖아. 감정이란 그렇게 충실해야 할 만큼 매우 중요한 것일까?” (같은 책 91p)
MZ 세대의 특징이라 논란거리가 되는 ‘솔직한 성격’에 대해서 위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특히 죄의 뿌리와 죄인의 본성을 가진 인간의 ‘솔직함’과 ‘본능’이란 결국 순수하지 않다. 다행히 ‘본성’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어진 피조물의 성질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맺어진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도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다. 가장 처음에 인용한 부분에서 료이찌가 루오의 그리스도 그림을 보며 성경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나와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강렬한 끌림을 받았던 것처럼.
순탄치 않은 나오미와 료이찌의 생활 도중 료이찌가 동창인 데루꼬와 불륜관계로 돈까지 받는다는 사실을 안 나오미가 <돌아온 탕자>로 부모님의 집, 교회사택으로 돌아오는 부분부터 소설의 후반부로 접어든다. 나오미를 되찾으러 온 료이찌는 객혈과 함께 그대로 나오미의 집에서 병을 치러내면서 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상반된다. 교회를 마뜩찮게 여겼던 료이찌였지만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과 돌봄, 용서의 체험을 통해 나날이 영혼이 되살아나는 료이찌와 반대로 배신감에 몸서리치며 자신의 주변에 산재한 다양한 인간관계들에서 ‘인간’와 ‘사랑’의 허무함을 느끼는 나오미의 변화는 씁쓸할 만큼 반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것이라도 생각했는데, 사랑도 결국은 이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본문 264p)
나오미가 그동안 무관심했던 ‘인간의 사랑’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 때, 료이찌는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료이찌의 마지막 역작이 된 그림에 대해 소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십자가 밑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맞으며 그리스도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는 사나이의 얼굴, 그것은 틀림없는 료이찌의 얼굴이 아닌가? 울고 있는 듯한, 회한에 찬 료이찌의 눈이 똑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것을 굽어보는 듯한 그리스도의 얼굴은 얼마나 깊은 자비에 넘쳐 있는지! 그 넘치는 듯한 자비로운 눈은 보는 사람을 위로하고도 남을 만큼 따뜻했다. (양치는 언덕 283-284p)
루오의 그림에 빗대어 료이찌의 그림을 상상해 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이 인간의 바닥임을 몸소 경험하고 또한 그렇게 살아온 료이찌의 용서를 구하는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깨달은 자의 것이었다.
인간의 사랑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실수투성이 삶을 살지 않는가. 오로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에서뿐이다. 료이찌는 방탕하고 죄많은 자신의 삶의 끝에서 제대로 예배 한번 참석한 적이 없었음에도 오로지 체험만으로 이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구원은 용서다. 죄를 사함은 용서다. 그것이 자비이며 긍휼이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메시지이다. 화가 루오는 유난히 십자가상 사건을 상세하게 시리즈로 그렸다. 겟세마네와 종려나무, 골고다 등 십자가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보를 그리며 그가 주시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다. 소설 속 료이찌가 그림을 보며 큰 위로를 받은 것처럼.
사순절에 우리는 부활의 기쁨에 이르는 40일을 묵상한다. 40일의 묵상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읽고 기적을 행한 행적과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을 본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사랑과는 다른 예수 그리스도만의 사랑이다.
나오미는 “방황하는 어린 양”을 자신에게 비유하며 먼 발치에서 양치는 언덕을 바라본다. 방황하는 어린 양이었던 자신과 료이찌를 향했던 용서와 사랑을 생각한다. 지난 주에 목장 편성을 다시 하며 이름만 남겨진 교인들의 명단을 짚어보았다. 방황하는 어린 양들, 언덕을 평화롭게 풀 뜯다가도 갑자기 성난 뿔로 싸움을 거는 어린 양들을 치는 목자는 회초리를 들지 않는다. 단단하고 긴 지팡이로 땅을 짚어나가고 방향을 지시할 뿐이다. 루오의 십자가 그림을 멀찍이 바라보니 그 속에서 목자의 교차된 지팡이가 흐릿하게 나를 쳤다.
박창수 목사 (인천 성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