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절은 지금의 내가 되어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마음산책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가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 쓴, 이 산문집에 매료된 것은.
“내 마음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다.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빠져들었고 아파야만 한다면 기꺼이 아파했으며 이 생에서 다 배우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텅 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그건 슬픈 말이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면서 나는 내가 도넛과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됐다. ... 나는 도넛으로 태어났다.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이 책의 서문을 읽고서, 이땅에 나랑 비슷한 결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과 위로를 받았다. 별난 것은 나만이 아니였단 사실에 드는 안도감과 동질감이랄까.
그래 나 또한 도넛이었구나. 도넛과도 같아 그렇게나 슬프고 아프고 외로운 것들에 내 마음이 동하고 멈추어 섰구나 했다. 사람은 자신이 마주했던 상황이나 일들이 스스로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될 때 그제서야 치유가 시작된다. 가슴 뜨겁고 감수성 풍부했던 이십대 시절의 나는, 현실적이고 성실한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자유 분방하고 감성적인 기질로 청소년기엔 내게 주어진 것들을 불평 없이 성실히 따르며 보냈지만 이십 대 시절엔 모두가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찾고 자리를 잡는 동안, 나는 대학 졸업 후 짧은 직장생활 후에 나 자신과 마주하며 부단히도 나 사람을 알고 내가 가야할 길을 찾고 묻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비어 있던 내 마음 한가운데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싶어 하는 나라는 사람을 내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면서 내면의 힘이 자라 빈틈없이 채워졌지만,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는 김연수 작가의 문장들은 변함없이 좋다. 여전히. 정말로 좋은 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다시금 끄덕인다.
“내가 사랑한 시절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 지금 내게서 빠져 있는 것들⋯⋯. 이 책에 나는 그 일들을 적어놓았다.”
서른다섯이 된 작가는 유년 시절, 청년 시절, 그리고 작가가 되기까지, 그는 그가 보내온 시간을 더듬어보며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한 문장들과 그리고 그 시절을 함께했던 노래의 가사와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가가 살아온 시대와 내가 자라온 시대는 분명 다르지만 그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어제 일처럼 생생해서 작가가 보내온 시간들이 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쓸데없다고 핀잔준다 해도 내 쓸모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걸 어떡하나.” p53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그 일들을 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문학을 한다. ... 내가 꼭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도 흥미가 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p67
“글을 쓸 때, 나는 한없이 견딜 수 있다. ...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때 내 존재는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 ... 인간이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글을 쓸 수 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p68-69
이십대 시절의 나는 잠깐 다닐 직장이 아닌 평생 할 수 있는 일, 나의 업을 찾아 헤매었다. 전공을 살려 실무 일을 해보았지만 주말과 빨간 날을 모두 반납하고 밤까지 새 가며, 내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이 일을 평생할 순 없다 싶었다. 누군가는 도급 순위나 연봉이 높은 기업에 들어가는 게 삶의 우선순위였지만, 나는 끊임없이 나와 마주하며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였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만 알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나를 먼저 알아야 했기에 내 안의 내게 묻고 또 물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알려줄 수 없고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다. 그 시간들은 외롭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웠지만 그 시간을 지나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으리라. 물음표만 가득했던 이십대 중반, 그 시절의 내게 김연수 작가는 이야기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내가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할 수 있는 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나만의 색, 나만의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없이 고민하고 씨름하는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내 뿌연 내면에 감춰진 능력을 보고 있었다. ... 살아오는 동안, 그 누구도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한 사람은 없었다. 내 성적과 생김새를 지적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내 안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직접 가리켜 말한 사람은 없었다.” p193
천문학과를 꿈꾸던 이과생이었던 작가는 대입 시험에서 천문학과를 지망했다가 떨어지고는 그가 좋아하던 시인이 글을 잘 쓴다며 격려해주고 알아봐 준 덕분에, 영문학과에 들어가게 되고 시를 쓰게 된 이야기. 작가가 아끼는 시집 중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네 사람이 합동으로 펴낸 시집 “사가시선” 중 유득공의 시 ‘부용산 중에서 옛 생각에 잠겨’ 말미를 소개하며, 그 시인의 격려와 지지로 김연수 작가는 결국 시인으로 등단하고, 번역서도 펴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주인이 집을 물가에 지은 뜻은물고기도 나와서 거문고를 들으람이라. 主人亭館多臨水 應使寒魚出聽琴
“쓸쓸한 물고기 같았던 내게도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 것은 내 안에 있는 재능을 더 열심히 살려보라고 권유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 나 같은 물고기에게도 거문고 소리를 들려주겠노라고 물가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런 일이 일어난 셈이다.” p195
“한때 그 푸르렀던 말들이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도 그처럼 푸르렀던 말이 있었다. 예컨대 “글을 잘 읽었다”라든가,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네가 어떤 시를 쓸지 꼭 보고 싶다” 같은 말들. 그런 말들이 있어 삶은 계속 되는 듯 하다.” p196
처음으로 그가 가진 재능과 그 안의 가능성을 알아봐 준 시인 덕분에 그의 글들은 세상에 나오고 우리는 지금 그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청춘은 내 안의 빛을 알아봐 주는 그 한 사람, 그것을 밖으로 이끌어내게 도와주고 지지해주는 그러한 한 사람이 꼭 필요한 것 같다. 그게 누가 됐든간에.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 하지만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일 수 있는지 알게 된 일이다. 내 안에는 많은 빛이 숨어 있다는 것,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란 그 빛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일이다.” p195
서른 다섯의 나는, 대단한 무언가가 되어있진 않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말이다.
그리고 하염없이 흔들리던 그 시절을 지나 단단한 내가 되었음을.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내 마음 안에 깊이 깊이 뿌리를 내려 흔들리지 않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음을 말이다.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p141
김은진 (윌로우리버 연합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