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가올 미래는 어떤 얼굴일까
<천 개의 파랑>-천선란 지음, 허블, 2020
SF소설이 좋다. 과학자들이 밝혀내고 정리한 이론에 접근하기 쉽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앞으로 달라질 우리 세계를 간접경험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과학’이라는 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결국 관심사는 그 세계를 살아갈 ‘인간’이다.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건 무엇인지 묻는다.
이 책이 묘사하는 근(近)미래는 인간을 닮은 로봇, 휴머노이드의 존재가 익숙한 세상이다. 그들은 여러 분야에서 인간이 하는 일을 대체한다. 화재나 사고 현장에서 가장 먼저 불길 속으로 투입되어 소방관의 일을 돕는가 하면, 편의점에서는 늘 웃는 얼굴을 장착한 서비스형 휴머노이드가 출퇴근 시간 없이 손님을 맞이한다. 실생활 뿐 아니라 레저 영역에서도 휴머노이드 로봇의 활약이 돋보인다. 경마장에서 달리는 말 등 위에는 더이상 사람이 타지 않고, 가벼운 소재로 제작된 휴머노이드 기수가 앉았다. 기수가 말에서 떨어져도 그저 기계가 망가질 뿐이었으니 사람들은 ‘더 빨리!’를 외치며 속도를 즐겼다.
소설 속 세상에서는 로봇의 활약 못지 않게 각 분야에서의 기술 발전도 눈부셨다. 특히 의료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함께했다. 안과 분야에서는 부작용 적은 렌즈 삽입술이 발전하면서 안경 쓴 사람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선천적인 이유나 사고로 인해 신체에 손상을 입더라도 병원의 의사는 “인간의 뼈대와 관절을 그대로 재현하는 생체 적합성 소재로 새 다리를 만들어주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가까운 미래에 인류가 이루어 낼 기술의 발전은 신체와 인공물 사이의 이물감을 거의 없애는 데에 성공했고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어보였다.
우리 인류는 ‘호모 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라는 별명을 가진 종 답게, 끊임없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그것으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 왔다. 인간은 새로운 기술, 낯선 기계와 언제든 가까워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문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다. ‘생체 적합성 의족’은 멋진 기술이지만 돈 없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가닿을 수 없는 세상의 것이다. 너도 나도 렌즈삽입술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안경 쓴 사람의 사정은 불친절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편의점 휴머노이드가 나타남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게 된 아르바이트생은 “세상이 바뀌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점주 앞에서 할 말을 잃는다. 벌어지는 계층의 격차는 기술의 발전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모든 것이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비인간 생물종의 처지는 더욱 고약하다. 휴머노이드 기수를 태운 채 제한속도 없이 달려야 하는 말의 신체는 급속히 퇴행했고, 달릴 수 없게 될 때에는 바로 폐기 대상이 될 뿐이었다.
다가올 미래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될 수 있을까. ‘함께’라는 말 안에 가난한 자도 포함될까, 장애를 가진 이도 포함될까, 종교나 신념이 다른 사람, 생김새가 다른 사람, 사람 아닌 비인간 종도 ‘함께’일 수 있을까. 쉽게 긍정하기 어렵다. 내가 이용하고 있는 전자책 플랫폼에서 이 책은 10점 만점에 9.6점이라는 높은 평점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별점 하나 혹은 두개를 준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의 취향이 제각각이니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만, 내 눈에 띈 건 그들이 적은 한줄평이었다.
“(별 하나) 이렇게 편협한 시각으로 쓰여지다니.”
혹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별 둘) 이렇게 의도적으로 편향되다니.”
이 소설이 마음에 안 드는 이유가 그 시각이 편협하고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 부분이 퍽 흥미로웠다. 언제부터인가 가난한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 여성들, 기술로부터 소외된 이들의 자리에 서서 이야기하면, 그건 중립적이지 못한 편향된 의견이라며 손가락질 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있자면, ‘함께’라는 울타리가 넓어지기는 커녕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날에 걸쳐 이 책을 읽었다. 그 사이 지인의 부고를 들었다. 그 또한 세상으로부터 ‘편향된 사람이다, 편협한 자다!’ 라는 말을 듣곤 했지만, 사실 그는 모든 존재가 화평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그리며, ‘함께’라는 울타리를 넓히고자 했고, 경계선에 있는 이들을 품으며 스스로 그 울타리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소식을 듣고 심란한 마음에 한동안 책을 펴지 못하다가, 다시 열었을때는 이 문장을 읽을 차례였다.
“사람은 아주 가끔, 스스로 빛을 낸다.”
책의 맥락과는 좀 달랐지만,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자기를 태워 빛을 내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빛 덕분에 세상이 유지되고, 그 빛이 하나 둘 모일 때 세상은 조금씩 변화하는 것 같다.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할 필요가 있을까. 오늘 하루 내가 마주친 이들의 얼굴에서 나는 다가올 미래를 본다.
2023.2.13 <오늘의 책> 기고글
- 정유은 (꿈이있는교회, L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