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몰랐던 북간도 독립운동이야기
<우리가 몰랐던 북간도 독립운동이야기>, 이옥희, 바이북스, 2020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의 현대사도 좌우로 갈라졌다. 우리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산화해 간 수많은 사회주의 계열 항일 독립투사들을 역사에 묻었고 그들 대부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일부 아는 사실도 대부분 왜곡되었다. 특별히 1920년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이후에도 북간도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수 만 명의 항일 무장 투사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상설, 이회영, 이상룡, 김약연 등 몇몇 항일 명망가들은 기억하지만, 항일무장투쟁을 가능하게 했던 물적 기반이었던 조선 민초들의 북간도 개척의 역사와 고난과 학살의 역사는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캐나다장로회의 협력과 지원으로 수많은 교회와 학교가 세워졌고 이곳에서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또한 경신참변과 같은 대학살사건과 자유시참변과 같은 불행한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 우파 중심, 민족지사와 명망가 중심, 1920년대 이전의 독립운동, 상해 중심 독립운동만 우리는 기억하고 기념할 뿐이다.
저자는 기독교장로회 목사로서 20여년 간 인도에 파송되어 최하층 빈민과 고아를 위한 사역에만 헌신한 박애주의자이다. 저자는 3년 동안 중국에 들어가 사는 동안 중국 서적을 뒤지고 북간도를 답사하며 집요하게 검증한 후에 ‘우리가 정말 몰랐던 잘못 알고 있었던’ 북간도 항일독립운동사를 이야기 형태로 정리했다. 이 책을 읽노라면 독립운동의 열정과 열기로 가득찬 1900년 초반의 용정, 연길, 왕청, 훈춘, 연통라자, 장암촌이 한눈에 그려지고, 이름 없이 쓰러져간 북간도 조선 독립군를 제대로 조명하고 미완의 독립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한다.
- 북간도에는 1800년대 중반부터 조선의 수탈과 학대를 피해 봉금령을 뚫고 이주해 가서 개척 정착한 조선 민중들이 있었고, 1910년대에 이미 20만 명에 이르렀으며, 한일병탄 이후에는 이주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망명 지사들은 이들 수전민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교육과 군사교육을 실시하였고 항일운동을 조직화하고 확산시킬 수 있었다. 이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중국인 지주인 점산호와 마름인 호주인으로부터 갖은 수탈과 차별을 당했고, 일제의 온갖 유혹과 이간질이 있었지만 항일 무장투쟁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의 승리가 가능했다.
- 캐나다장로회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반대하고 독립운동을 지지했고 조선독립군을 교육하고 보호하고 치료를 해주어서 어디서나 대환영을 받았다. 북간도 100개 이상의 마을이 캐나다장로교 선교부와 협력하여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항일구국교육을 펼치고 무장투쟁을 지원했는 데, 그 중심에는 간도국민회와 국민회군을 조직한 기독교인 구춘선 회장과 구선례(그리어슨) 선교사가 있었다. 또 훈춘 한민회, 기독교우회를 설립하여 무장투쟁을 한 소작인 출신 기독교인 황병길과 그 가족(아내 김숙경, 자녀 황정선, 황정신, 황정일, 황정해) 모두가 항일무장투쟁을 하다가 장렬히 산화해 갔다.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를 진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공산당 가입 경력 때문에 우리의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다.
- 청산리 봉오동 전투 이후 일제는 스스로 조작한 훈춘사건을 빌미로 25,000명 관동군을 투입하여 독립운동 근거지인 조선인 마을들을 초토화 시키고 양민 3,664명이나 학살하고 수많은 여성을 강간했다. 경신참변 때 불탄 캐나다장로회 소속 교회만 52개에 달했고, 일제의 불령선인 명단을 보면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간도국민회가 일제의 타깃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간도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1930년대이후에는 캐다다장로회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되었으나 그들의 교육을 받고 자란 문익환목사 등 후세들을 통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관동군의 압박이 심해지자 각계의 독립군 약4,000명은 러시아의 지원 협력을 얻어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자유시에 집결했다. 자유시 참변은 표면적으로는 상해파와 이르츠쿠파 공산당 소속 독립군 사이의 주도권 다툼 때문에 발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소비에트러시아, 일본, 중국의 정치적 상황과 강대국 간의 이익에 기반한 협상이 결과적으로 조선독립군을 희생양으로 만든 사건이다. 자유시 참변에서 희생된 독립군은 천민과 소작인의 아들이었으며 죽음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열망했던 숭고한 젊은이였다. 자유시 참변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편견과 불신과 증오의 재생산 확대보다는 죽어간 무명의 청년 투사에게서 평화통일의 희망을 보았으면 좋겠다.
- 북간도 조선족의 역사는 수전민의 시대(1850~1905), 망명 지사의 시대(1905~1925), 사회주의 영향 하의 대중 항쟁시대(1925~1945)로 나눌 수 있는 데 수전민 시대와 대중 항쟁시대에 대한 보다 많은 공부와 성찰이 필요하다.
- 한국은 여전히 ‘포스트 조선사회’이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사대주의, 임시정부의 사대주의 행각과 분열, 대한민국 수립후 사대주의와 분단과 적대는 조선의 연장선에 있다. 거족적으로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조선사회를 벗어날 수 없다.
신영배 (경기중부기독교교회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