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품은 오늘
설날이다. 설날을 맞아 가정마다 행복하고, 다복하고, 만복이 깃들기를 바란다.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다. 진행자가 여성이었는데 모든 사람이 설날을 즐기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였다. 이를테면 설맞이의 두려움을 품은 여성들이 지닌 부담에 대해 말하면서, 준비하는 마음을 권유한다. 남을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따듯하게 무장하도록 강권하였다. 명절은 모두에게 힘을 주는 날이어야 한다.
설날에 세뱃돈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세뱃돈만큼은 날이 선 빳빳한 새 돈으로 주고 싶어서 은행 창구마다 붐빈다고 한다. 어떤 여론조사에 따르면 세뱃돈을 받는 입장에 있는 초등학생들은 대개 5만 원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단다. 제법 기대의 규모가 크다. 그런데 세뱃돈을 주는 입장에 있는 어른들의 40%는 1만 원이 적당하다고 했다. 주고 받는 입장에서 그 어마어마한 간극을 어찌 메울 것인지 설날 아침에 신경전이 일 듯 하다.
설날의 즐거움은 마음껏 덕담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으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덕담한다. 사실 정초에 이미 주고 받은 말이니, 말의 성의가 반감되었다. 그렇다면 기왕에 하는 덕담은 보다 단정적으로 할 이유가 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셨다지요.”
“새해에 건강한 손주를 보셨다지요.”
“새해 사업이 큰 성취를 이루셨다지요”
원래 덕담은 이미 복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덕담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보면 그 시선이 현실에 정지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보다 앞서 나갔다. 그래서 미래의 일을 말하는 예언형 문장의 경우 완료형으로 썼다.
올해는 계묘년(癸卯年), 토끼의 해이다. 12간지(干支)에서 네 번째 해이고, 육십갑자(甲子)로는 사십 번째다. 사실 달력 속 열두 동물은 모두 영물처럼 여겨져, 저마다 꿈과 희망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해마다 사람들은 달력에 얽힌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희망을 부추긴다. 이를테면 “토끼띠는 천성이 착하고 겸손하면서도 지혜롭다. 감수성이 뛰어나 예술성이 강하다. 반면 생각이 앞서 재능만 믿고 게으르며 수동적인 게 흠이다”(명리학자 전형일) 따위다.
그럼에도 모든 달력은 일상의 곳곳에 길일을 숨겨두면서 다양한 희망 만들기를 농축해 놓았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민담에 따르면 민중의 꿈과 희망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그 속에 저마다 다양한 희망 체험을 담아 두었다.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고 억압하는 힘 있는 자로 표현되지만, 항상 곶감이나 쇠똥 따위에게 당하고 만다.
그 이유는 옛날이야기는 언제나 내일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민족의 처지를 보면 희망보다는 절망에 익숙하고 길들여졌다. 자주 좌절하고 넘어진 경험을 가진 약소 민족이어서 그만큼 희망 만들기가 버거웠을 것이다. 아마 고유한 우리말 가운데 ‘내일’을 표현하는 낱말이 없는 배경일 것이다. ‘명일’이니 ‘익일’과 같은 한자어들과 옛 문헌에 ‘날새’나 ‘앞제’처럼 우리말로 바뀐 외국어는 있을지언정, 그 안에 희망을 품은 미래지향적인 내용을 품지는 못하였다.
일제시대에 활동한 전재선 목사는 내일(來日)이란 말에 담긴 ‘올 래(來)’ 자를 이렇게 풀었다.
“‘올 래(來)’ 자는 ‘열 십(十)’ 자와 ‘사람 인(人)’ 셋으로 이루어졌다. 열 십자는 십자가(十)요, 한 사람(人)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두 사람(人人)은 죄우 편의 강도들이다.”
마침내 강도의 처형대인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영원을 향한 희망의 표식이 되었다. 내일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고난을 뛰어넘으려는 결기와 진리를 선택함으로서 가능한 법이다.
시간과 희망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러기에 새해는 만사를 포기한 이들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행여 내일에 대한 기대를 잃은 이들이라도 희망의 시간은 끝내 붙잡아야 할 동아줄과 같을 것이다. 희망은 덕담처럼 쉽게 말하지만, 겨울의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처럼 지난한 과정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거두어 치우고, 역사를 마감하는 분이 아니라 새날을 여시고, 새 일을 행하시고 복을 내리시는 분이다. 희망의 사람은 좋은 날씨, 나쁜 환경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소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내일’에 참여하는 그 사람에게 복이 있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