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몽적 파국, 팬데믹의 사유를 되짚어 새해의 파국적 예측을 넘어서기 위하여
<파국이냐 삶이냐 팬데믹 시대의 사유>, 장 피에르 뒤피, 산현재
“파국이 온다는 데 우리 정신이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철학의 치욕이다.”(<파국이냐 삶이냐> 10p) 파국이 다가온다는데 우리 믿음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신앙의 치욕이다. 파국의 철학자라 불리는 장 피에르 뒤피의 사유일기 <파국이냐 삶이냐>의 책 표지는 요나가 고래 입에서 육지로 뱉어지는 그림(유스투스 요나스, 1517)이 실려 있다. 요나로 비유되곤 하는 철학자가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불규칙적으로 써 내려간 일기 모음집인 이 책은 마치 고래 뱃속에서 기도하는 시간 외에 홀로 머릿속으로 사투를 벌인 인간 요나의 사적인 기록 같은 면이 있다.
이 책은 쉽지 않다. 저자가 내뱉는 어조는 강하고 방대한 지식을 활용해 강조하는 주장들이 쉽게 납득해서는 안되는 것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놓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파국, 또는 마지막이 온다는데 당장 마스크 자율화나 경제위기에만 급급한 지금, 생명의 신성성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면 안되겠다는 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아직 코로나가 끝나지 않았는데 팬데믹 시기에 둔해져 버린 생명과 삶에 대한 감각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코로나에 대한 흉측한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공포에 떨었던 때에 작가는 두려움에 떨거나 정책과 백신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사유하기로 했다. 막연했지만 이제는 실제가 되어버린 급작스런 죽음과 파국, 삶과 생명에 대해서, 생명을 열망하는 존재에 대해서.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열망한다. (38p)
작가는 직면한 ‘죽음과 생명’에 대해 직관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미 나이가 많은 자신도 죽기 싫은 건 매한가지라는 솔직한 심정으로 모든 죽음과 모든 삶의 가치를 다시금 매긴 후 생명에 대한 열망, 삶에 대한 노골적인 철학을 펼쳐낸다. 살아 있는 것, 생명과 비생명, 존재성, 빔(空), 죽음에 대한 다발적인 사유는 구체적인 코로나 관련 통계자료와 프랑스 저널의 대응, 다른 철학자, 정치인들의 코로나회의주의식 태도와 함께 펼쳐진다.
가장 눈여겨봐야 할 개념은 ‘생명’이다. 사회적인 생명, 정치 생명, 인간 생명, 그리고 벌거벗은 생명 등으로 나뉘어 문명과 함께 다양화된 ‘생명’개념 중, 저자는 코로나로 급사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며 실제적인 ‘생명’, 벌거벗은 생명, 생명의 우위에 대해 고민한다. 체면과 위신, 인간다운 생명보다 앞서는 ‘본질적인 생명’에 대한 개념의 중요성이다. 정치적인, 경제적인, 자유, 평등, 박애의 여타 다른 생명의 개념보다 말 그대로 ‘살아 있음’ 자체가 중요했던 코로나 시기, 저자는 신명기 20장 19절 말씀을 떠올리며 성스러운 것은 생명이고, 삶 자체는 희생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어 작가의 사유는 생명을 다루는 생물학, 과학철학으로 이어진다. 생물학에 대한 현재 세계 과학, 인문, 철학의 흐름을 설명해 주는 대목은 2023년을 살아가야 할 우리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인문소양이기도 하다. ‘자연기계’라는 오래된 형이상학적 관념과 인지학과 연계한 인공지능기술과학, ‘인공기계’로 표현되는 생명과학의 오만함에 이르는 광범위한 사유도 함께 적혀 있다.
코로나의 대규모 인류학살은 종교에 대한 회의와 종교에 대한 맹신을 동시에 낳았다. 다만 교회는 모이지 못하는 환경에 대해 미온적으로 수습한 경우가 많았고 너무 늦거나 온건적인 태도로 성도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감’과 ‘죽음과 불안의 공포’를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 면이 있다. 비대면의 힘을 입어 발전된 기술에 자리를 내주고 백신과 의학의 연구에 고삐를 풀어 신의 ‘생명 설계’에 의구심을 가진 이들에 대한 대처도 미흡했다. 저자 또한 생명과학 철학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같은 ‘생명기계’,‘인공기계’,‘생명 설계’를 둘러싼 생명과학기술과 그 전반에 깔린 철학을 차분히 곱씹는다. 인간이 더 나은 생명 설계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사유는 코로나에서 출발한 ‘생명’에 대한 쟁점을 보다 높은 관점으로 이끈다.
”오늘날 실험실에서는 더는 생명에 관해 묻지 않는다. 오늘날 생물학이 흥미를 갖는 것은 생명 세계의 알고리즘이다.“(1970, 프랑수아 자콥, 책 87p에 인용) 자연과 생명을 재현하면서 자연 기계가 인공기계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본성’상 인공 기계를 만드는 우리 인간들은 왜 자연보다, 자연이 만든 인공기계보다 더 잘 만들지 못할까?(190p) 인간이 생명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인공 생명이 생명이 아니라는 ‘선험적’ 철학 논변이 존재한다. 인공적이라는 말은 어떤 정해진 목적을 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그 말은 ‘살아있는’이라는 말과 대립한다. (192p)
실제적인 ‘생명’의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저자는 현대 과학계에서 다루는 생명철학에 대한 사유에 이르자 ‘생물학적 생명’이라는 우상에 대한 경고에 이른다. 그리고 영적인 가치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코로나 시기를 틈타 자유를 얻은 생명과학계의 오만에 대해 경고한다.
팬데믹 초기에 ”인공지능시대의 교회“에 대한 학술기사가 난 것을 본 적이 있다. AI 목사에 대한 논의, 인공지능도 전도의 대상인가 등에 대한 학술대회 평이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저자의 ‘생명’에 대한 접근, 철학적 사유가 배제된 연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저자의 사유 흐름대로 죽음에 대한 사유가 부재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타 종교와 기독교를 구분 짓는 명확한 기준이 된다. 죽음 너머의 부활이나 천국의 소망같은 큰 주제도 그렇거니와 팬데믹이나 도처의 불확실성이 도사리는 우리의 일상에 근접한 죽음도 그렇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들어 불멸에까지 뻗치고 있는 생명과학에 대해 ”죽음의 가치가, 그것이 사라지는 바람에 지나치게 폭등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본문 198p인용)라며 경고를 보낸다.
‘때가 되면’ 이라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죽음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어떤 순간이 올까? (203p) 죽음이라는 영원한 휴식과 정반대의 삶의 소용돌이. 이 둘은 무한히 멀어지면서 무한히 가까워진다. (중략) 삶은 그것의 불완전성이 완전히 사라질 때 불완전한 삶이 아니다. 그것은 곧 죽음이다. 아니다, 그것은 이 불완전성 자체로서의 삶이다.(218p)
다시 요나와 파국주의로 돌아온다. ‘인류가 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라는 적과 악전고투를 하고 있다고 해서 코로나 이전에 인류의 미래를 짓눌러 왔던 위협들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256p)기 때문이다. ‘계몽적 파국주의’를 지향하는 저자는 요나의 예언, 성경 속의 많은 예언자들에 모순을 상고한다.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라는 파국의 예언을 예언하지만 회개한 니느웨 덕에 그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는, ‘자기장애의 예언’이다. 하나님의 예언은, 많은 파국과 형벌의 예언은 작가가 꼬집는대로 성취되지 않기 위한 예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파국의 예언은 사실은 삶의 예언인 셈이다. 책의 중반부 내내 마치 무신론자처럼 굴었던 작가였지만 복잡성의 원리와 죽음-생명-죽음-파국의 사유 굴레 속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예측은 되었지만 언제인지는 알려지지 않은 파국에 직면한 예언(274p)“이자 ”파국이 나타났을 때는 억제력의 역할을 하도록, 파국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희망을 보존하도록“(270p) 함으로서 결국은 생명과 삶으로 향하는 길이다.
과연 나는, 목회자는, 교회는 팬데믹 시대에 생명과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회고해본다.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실제적이지 않은 ‘생명’ 대해서만도 안되고 죽음에 대해서만도 안되며 파국의 예언만이어서는 안 된다. 실재하는 ‘생명’ 대한 담론들, 사유들, 철학과 믿음들에 대해 무지해서도 안 된다. 주님이 주신 ‘생명’과 ‘삶’에 대하여, 그리고 2023년의 시작부터 온갖 부정적인, 실로 ‘파국’적인 세상 예측에 대해 그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억제하면서도 희망을 보존토록 하는 중첩을 찾아야만 하겠다는 결심이 든다. ”삶이란 매일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순수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삶은 죽음보다 힘이 세.“(80p)기 때문이다.
박창수 목사 (인천성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