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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24]
 
 
 
     
 
 
 
작성일 : 22-12-12 00:44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글쓴이 : dangdang
조회 : 7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633 [125]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나가노 교코, 한경arte)

 

요즘 사회 상황이 점점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다양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KAOS(https://ikaos.org/kaos/) 재단은 11/29-12/21 동안 '진화가 필요한 순간'이라는 주제로 강의와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진화는 다양함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 2022-10-25~2023-03-01 동안 전시되고 있다. 합스부르크는 근친결혼(순혈주의)이라는 말로 정의되기도 한다. 다양함 이란 관점에서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나카노 교코(中野京子)라는 일본 미술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다.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교에서 독일 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와세다대학교에서 독일 문학과 서양 문화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독문학자이자 작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무서운 그림》 시리즈, 《나카노 교코와 읽는 명화의 수수께끼》, 《명화와 함께 읽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 《다리를 둘러싼 이야기》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등을 옮겼다. 월간 〈분게이슌주〉에 '나카노 교코의 명화가 말하는 서양사'를 연재했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 《무서운 그림》 시리즈, 《명화의 거짓말》 시리즈, 《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 《욕망의 명화》, 《운명의 그림》, 《처음 가는 루브르》, 《내 생애 마지막 그림》, 《오페라처럼 살다》, 《명화로 보는 남자의 패션》, 《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세계의 다리를 읽다》, 《잔혹한 왕과 가련한 왕비》, 《무서운 그림으로 인간을 읽다》,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 등이 있다. (교보문고) 이중 《무서운 그림》 시리즈를 재미 있게 읽어 본 경험이 있었다. 

 

이 책의 구성은 

들어가며 

합스부르크 가계도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 합스부르크가

제1장 알브레히트 뒤러, 〈막시밀리안 1세〉

제2장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광녀 후아나〉

제3장 베첼리오 티치아노, 〈황제 카를 5세의 기마상〉

제4장 베첼리오 티치아노, 〈군복 모습의 펠리페 황태자〉

제5장 엘 그레코,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제6장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제7장 주세페 아르침볼도, 〈베르툼누스의 모습을 한 루돌프 2세〉

제8장 아돌프 폰 멘첼, 〈프리드리히 대왕의 플루트 연주회〉

제9장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

제10장 토머스 로런스, 〈로마 왕(라이히슈타트 공작)〉

제11장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 〈엘리자베트 황후〉

제12장 에두아르 마네, 〈막시밀리안의 처형〉

맺으며 

 

위와 같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중세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650년에 걸쳐 유럽 및 세계 여러 지역을 지배하였다. 긴 시간동안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독점하면서 주변 국가와 정략적 혼인관계를 맺으며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는 유럽 역사의 중심을 이루고 피의 역사, 공포의 역사, 통합의 역사가 혼재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 합스부르크 왕가는 중요 미술품의 배경이 되었으며, 수많은 명화를 포함한 예술품을 소장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은 오스트리아와 수교 100주년 기념으로 유명한 합스부르크 그림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원은 의외로 오스트리아도 독일도 아닌, 10세기 말쯤 스위스 북동부의 시골구석에서 등장한 약소 호족이었다. 아래 가계도가 이 책을 요약해 놓은 것이지만 어려운 외국이름 그리고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워 가계도를 글로 정리하게 되었다.

  


 

 

그 호족으로부터 2, 3세대가 지난 11세기 초 합스부르크성 하비히츠부르크(Habichtsburg)가 세워졌다. Habicht는 사냥매 Burg는 요새라는 뜻이며, 여기서 Habsburg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12세기가 되자 이성을 본거지로 삼은 합스부르크 백작을 칭하게 되는데 이를 합스부르크가의 시작으로 본다. 13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놓고 여러 세력들이 마치 일본 전국시대처럼 군웅할거 상태에서 서로 황제자리를 피하다가 무능하다고 여겼던 시골 그리고 55세의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보헤미아왕 오토카르 2세가 반발하여 오스트리아 마르히펠트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n the Marchfeld)에서 루돌프가 승리하였다. 이 승리로 루돌프는 보헤미아를 손안에 넣게 되었다. 곧이어 오스트리아 일대도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루돌프 1세로부터 안정적인 황제 자리를 계승할 때까지는 여러 세력의 견제로 150년이란 세월이 흐르게 된다. 그리고 50년이 더 지난 15세기말 독일 왕겸 신성로마제국 황좌를 차지하게 된 이는 막시밀리안 1세이며 합스부르크가의 영웅이 된다. '중세 최후의 기사'라는 칭호를 얻는 막시밀리안 1세는 정정당당하게 기사답게 싸웠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며 현재의 빈소년합창단의 바탕이 된 궁정 예배당 소속 성가대를 창설함과 동시에 예술가를 비호하고 직접 시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노련하게도 예술을 프로파간다로서 이용하여 알프레드 뒤러(당시 독일의 유명한 화가) 등에게 큰 목판화를 만들게 하거나 삽화를 만들게 하여 신하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알프레드 뒤러의 그의 초상화에는 황제를 찬양하는 라틴어 명문이 이 쓰여 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막스밀리안 황제는 정의와 지혜와 관용에 있어 특히 또 고매함에 있어서 다른 모든 왕들보다 뛰어났다. 막스밀니안 황제는 1459년 3월 9일에 태어나 1519년 1월 29일 59년 9개월 하고도 25일 만에 붕어했다. 이 위대한 왕에게 영광 있으리라'. 

 

다시 말해 이 초상은 막시밀리안 1세가 서거한 직후 작품인 셈이다. 막스밀니안 1세는 혼인 외교를 통해 넘어져도 빈손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아버지에 의해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를 부르군트공국(지금의 프랑스 부르고뉴,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에 해당하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영을 자랑하던 나라)의 마리아와 결혼시켰더니 애쓰지 않고도 합스부르크가에 막대한 부와 영토가 굴러 들어왔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전쟁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말이 생겼다. 누가 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유명한 가훈이 탄생했다고 한다. 막시밀리안 1세 역시 아버지의 방식을 따라 아들인 미남왕 펠리페와 에스파냐 왕녀 후아나 그리고 딸 마리가렛테를 에스파냐 왕자 후안과 이어준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에스파냐 왕가의 이중 결혼에는 당연히 조건이 붙어 있는데, '어느 한쪽에 가계가 단절될 경우 남은 쪽의 영지를 상속한다'는 내용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펠리페와 후아나 사이에는 2남 4녀가 태어났지만, 후안 마리가렛테 사이에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 펠리페가 돌연사하여 그이 아들 즉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카를이 에스파냐의 왕좌에 오르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죽기 전에 손주까지도 혼사를 정해 주었다. 카를은 포르투갈 왕녀와 카를의 남동생은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 카를 여동생은 마찬가지로 보헤미안 헝가리 왕자의 이중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에스파냐 때와 같은 조건을 계약 결혼을 성사시켰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에스파냐 때와 완전히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카를은 카를5세가 되고 그 치하에 에스파냐는 '해가 지지 않는 세계 제국'의 기반을 닦았고, 합스부르크가는 에스파냐에 굳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의 직함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왕, 독일왕, 이탈리아왕, 오스트리아 대공, 네덜란드 영주 등 20여 가지였고, 제국에서는 카를 5세, 스페인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Carlos I)로 호칭되었다. 그리고 후아나의 차남인 페르난도는 카를5세에 의해 오스트리아로 보내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제 '합스부르크의 주걱턱과 입술'에 대하여 다루어야 할 차례다. <막시밀리안 1세와 가족> 그림에는 막시밀리안 1세, 미남왕 펠리페, 막시밀리안의 아내 마리아, 페르디난트 1세, 카를5세(카를로스 1세)가 그려져 있다. 주목할 점은 유독 턱이 튀어나온 젊은 카를5세이다. 카를은 아래턱이 위턱보다 극단적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부정교합이 너무 심해 항상 입을 벌리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유전적 특징은 혈족 결혼을 통해 자손들에게 전해졌으며 결국 합스부르크가를 끝내게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카를5세의 적장자인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의 황금시대에 군주가 되었다. 첫 번째 결혼은 포르투갈 왕녀로 그의 친사촌이자 외사촌이었다. 그녀가 난산을 하여 자식이 없었다. 두 번째는 27세 때였으며 열한 살 연상인 잉글랜드 여왕 메리 1세(엘리자베스 여왕의 배다른 언니)였다. 하기 싫은 결혼이지만 아버지의 명령(신교로부터 구교 잉글랜드를 구한다는 명목)에 하게 되었다. 이 계약 결혼은 메리가 잉글랜드를 떠날 필요가 없으며 에스파냐의 군대가 잉글랜드에 주둔할 필요가 없으며,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날 아이가 잉글랜드를 물려받고 만약 펠리페 2세 아들인 돈 카를로스가 사망하면 에스파냐를 함께 물려받는다는 내용으로 체결되었다. 펠리페는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떠나게 되고 메리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신교도 수백 명을 죽이게 된다. 이 덕분에 메리는 '블러드 메리'(보드카와 토마토 캐쳡으로 만든 칵테일로서 붉은 피색이라 블러드 매리라는 칵테일 이름이 되었다). 드디어 임신을 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상상 임신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늙은 메리에 대하여 자식을 기대할 수 없었던 펠리페는 잉글랜드를 떠났고 메리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1년 3개월이 지난 후에 잉글랜드를 방문하게 된다. 펠리페의 속마음은 메리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프랑스와 전쟁을 하기 위한 자금 조달에 있었으며 차기 여왕 후보인 엘리자베스와 비밀 결혼을 타진하기 위함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펠리페를 가지고 놀다가 '가톨릭교도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자 펠리페는 적국 프랑스와 손을 잡고 프랑스의 앙리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와 결혼식을 갖게 된다. 세 번째 결혼인 것이다. 원래는 자기 아들인 카를로스와 약혼한 사이였다. 

 

카를로스는 건강이 안 좋았고 병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펠리페는 또 다른 건강한 아들을 낳기를 원했다 세 번째 아내인 엘리자베트와 사이에 아들을 낳았는데 겨우 2개월 만에 조산했다.  이런 초조함 때문에 펠리페는 건강하고 다산을 할 수 있는 여성을 찾았다. 그 여성은 과거 10명의 아이를 낳은 여동생이었다. 외삼촌과 조카딸의 결혼이 성립된 것이다. 안나였다. 네 번째 결혼인 것이다. 안나는 또 역시 출산 때문에 결국 죽게 되었다. 53세의 펠리페는 독신이 되었다. 안나는 다산은 하긴 했지만 차례차례 아들들이 죽고 단 하나의 훗날에 필리핀 3세가 된 아이를 낳게 된다. 53세의 펠리페는 독신이 되었고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 다음 상대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메리는 반란죄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왕관을 빼앗겼고 목이 잘리고 말게 된다. 그사이에 펠리페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도 청혼을 하게 된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영국과 결혼한다고 하면서 거절한다. 펠리페는 점점 거만해지고 더욱 신중해져서 신중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점점 노쇠해 가는 펠리페는 한층 더 신앙심이 깊어져 펠리페는 내면세계에만 골몰하게 되었고 금욕적인 종교화에 둘러싸이고 싶어 했다. 펠리페는 72세 나이로 숨을 거둔다. 

 

네 번이나 결혼하고 결함투성이였던 장남 카를로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펠리페에게 남은 것은 결국 덜 떨어진 아들 펠리페 3세였다. 펠리페 3세는 신하들에게 일을 전부 떠맡기고 내내 사냥만 즐기며 존재감 없이 살다가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덕분에 그의 아들 펠리페 4세는 16세 왕에 올랐고 시작부터 아버지와 똑같이 신하에게 정부를 위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의욕도 능력도 없었던 탓에 그 상황에 안주했던 펠리페 4세는 재위기간 내내 무능왕이라는 딱지가 따라다니게 된다. 다만 예술 특히 회화에 있어서는 조상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감각을 발휘해 왕실의 소장품을 늘려갔다. 펠리페 4세는 기존에 티치아노는 물론 색의 최고라고 칭송받던 루벤스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디에고 벨라스케를 등용하게 된다. 

 

펠리페 4세는 젊은 시절 프랑스 앙리 4세의 딸과 결혼해 밝고 활기찬 황태자 카를로스를 얻지만 대를 이을 중요한 아들은 17세에 요절하였고 뒤이어 왕비까지 출산 후 후유증으로 죽는 비운을 맞게 된다. 결국 친누이 딸, 다시 말해 조카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 아내의 이름은 마리아나인데, 다시 말해 외삼촌과 결혼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얼마나 피가 진해졌는지 처음부터 짚어보면, 초대 카를로스 1세는 사촌 동생과 2대째 펠리페 2세는 조카와 3대째 펠리페 3세는 사촌형의 딸과 그리고 4대째 펠리페 4세까지 조카와 결혼했다. 조건은 꼬이고 꼬여서 조만간 또 숙모가 되는 등 복잡하고도 무시무시하게 뒤틀린 근친 관계도가 완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출산은 당연히 사산이나 선천성 질병, 높은 영아 사망률로 나타났다. 그런 위험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고귀한 피가 천한 피로 섞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마리아나는 차례로 네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마르가리타 외에 나머지 아이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자라지 못했다.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마리아 테레사는 루이 14세와 결혼하기로 정해져 있으므로 에스파냐를 물려받을 사람은 다섯 살 난 마르가리타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 펠리페 4세는 마지막 노력을 통해 마리아나에게 아들을 얻었다. 마르가리타 남동생이자 후계자가 될 아들이었다. 마르가리타의 운명도 바뀌어 어머니와 같은 15세의 나이에 어머니처럼 외삼촌과 결혼이 결정된다. 그녀 또한 어머니처럼 아이를 낳자마자 차례차례 잃은 끝에 21세 나이에 죽고 만다. 

 

마리아나가 난 카를로스 2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주받은 아이로 불리하게 된다. 비정상적으로 농축된 피 때문에 결코 후계자를 만들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에스파냐는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어 간다. 증조부가 끊임없이 싸우며 쟁취한 재산을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카를로스 2세가 탕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카를로스 2세에는 후계자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문을 닫게 된다. 카를로스 1세가 태어난 때가 1500년 그로부터 딱 200년 뒤 1700년 카를로스 2세가 사망했다.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자마자 에스파냐 계승 전쟁에 돌입했다. 그 전쟁은 즉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와 프랑스의 브루봉 가문과의 전쟁이었다. 세계 공용어는 이쯤에 에스파냐어에서 프랑스어로 대체되게 되었다.

 

혈족 결혼을 반복하고 비정상적일 정도로 피가 농축되어 자멸의 길을 걷고 있을 때 한 뿌리에서 갈라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로 가보자. 형 카를 5세에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칭호와 오스트리아를 물려받은 페르디난트 1세였다. 페르디난트 1세와의 아들이 막시밀리안 2세와 카를 5세의 딸인 마리아 사이에 루돌프 2세가 탄생하게 된다. 그는 역대 합스부르크 인물 중에서도 유달리 특이했다. 초상화를 보면 실제로 루돌프 2세의 얼굴은 사촌지 간이었던 양친의 특징을 강하게 물려받아 주걱턱과 아랫입술 들어진 전형적인 합스부르크가의 얼굴임을 알 수 있다. 당시 관례대로 루돌프 2세도 일찍이 약혼자가 정해져 있었다. 상대는 펠리페 2세의 딸이었다. 다시 말해 또 다시 순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사촌 간의 결혼이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상한 행동을 하여 결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루돌프는 통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신대륙에서 가져온 물건이나 신기하고 보기 드문 물건을 수집하고 분더카머(16~17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진귀한 물품들을 모아둔 공간)를 만들기에 열중했다. 그의 회화 컬렉션이 현재 빈미술사미술관의 기반이 된 것만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페르디난트 1세와 안나 황후의 셋째 아들인 페르디난트 2세가 루돌프가 죽은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한다. 페르디난트는 펠리페 2세처럼 카돌릭교도여서 신구 용합엔 관심이 없어 합스부르크가는 길고 긴 무시무시한 30년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30년 전쟁(1618년~1648년 30년)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마지막이자 최대의 종교 전쟁이며, 무대가 된 독일은 엄청나게 황폐해져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합스부르크가는 부르봉가로 갈라졌으며 이때부터 유럽에서 프랑스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카를 6세로부터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여제가 탄생하게 된다. 합스부르크가가 도와주었던 프리드리히가 오스트리아를 집어 삼키려고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을 시작하였다. 당시 넷째를 임신 중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며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정치수완으로 이를 지켜낸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남편 프란츠 1세가 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식으로 황후가 된다. 실질적으론 정치는 그녀가 다 도맡았기에 여제라 불린다.  

 

재미있게도 프리드리히 대왕은 종교에 대한 자유가 어느 정도 부여되어 인구가 증가된 프로이센을 지배하면서 합스부르크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공사가 다망한 중에서도 아이들 무려 열여섯 명이나 낳았다. 테레지아가 자신의 딸들을 정치적 카드로 삼았다. 그녀에게는 딸들의 행복보다는 합스부르크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11녀인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투아네트)는 무능한 루이 16세의 부인이 된다. 이 결혼은 불길한 결혼식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혁명 정부에 이어 먼저 루이 16세가, 그 다음에는 앙뚜아네트가 기요틴에 의해 이슬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인 프란츠 2세(앙뚜아네트가 고모)에게 돌아갔다. 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도 포기하게 된다. 스스로 오스트리아 제국 초대 황제 프란츠 1세로 칭하며 그럭저럭 체면을 유지하였다. 

 

나폴레옹은 사랑하는 아내 조세핀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음 깨닫자 이혼한 뒤 프란츠 2세의 딸인 마리아 루이스를 선택했다. 이는 몇 세기 동안 거부했던 천한 피가 합스부르크가에 섞이는 것이기도 했다. 마리아는 나폴레옹 2세인 라이히슈타트 공작이 되었다. 그는 잘 생겼고 똑똑하여 나폴레옹처럼 되고 싶었지만 일찍 죽게 된다. 그가 죽은 뒤 20년 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되어 프랑스에 군림한다. 라이히슈타트 공작은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직계는 끊겼다. 이후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오스트리아에서 나온 히틀러라는 이름의 괴물이 독일의 총통이 되어 신성로마제국의 제3제국 건설을 외치며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것이다. 그는 이미 프랑스를 지배하에 두었는데 회유책을 위해 라이히슈타트 공작의 유해를 프랑스로 옮겨 나폴레옹 옆에 안치시킨다. 

 

프란츠 2세가 사망하자 장남 프란츠 카를이 되어야 하는데 그의 아내 조피가 반대하여 프란츠 카를과 조피의 아들인 프란츠 요세프가 뒤를 잇는다. 프란츠 요세프는 바이에른 공국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한다. 일단 비탈 아래로 굴러가기 시작한 공은 누구도 멈출 수도 없듯이 제국의 종언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잃고 프로이센에 당하고 통일 독일에서 배제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 제국이라는 기묘한 형태는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위태로웠다. 1914년 프란츠 조세프의 후계자로 지명된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마저 잃게 된다. 페르디난트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의 손에 암살되었고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가 되었다. 불사조라 불리며 만년에 신격화되기까지 했던 프란츠 요세프가 86세의 나이로 서거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한가운데였다. 합스부르크 마지막 황제였던 것이다.

 

아주 길게 합스부르크 가계를 독후감으로 쓰게 되었다. 이 책은 제목처럼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이기 때문에 주제인 합스부르크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명화를 감상한들 잘 이해가 될 것 같지 않았다. 합스부르크가는 유럽이고 유럽은 합스부르크이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 책에서 나오는 여러 화가는 학교에서, TV에서, 유럽 여행가면 만날 수 있는 명화들의 작가이다. 이들 작가의 그림으로부터 합스부르크가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을 독후감으로 선택한 이유는 다양성이다. 합스부르크가는 결혼으로 흥했지만 근친결혼으로 쇄했다. 주걱턱, 처진 입술, 자손의 약한 건강 등 나쁜 유전적 특징이 근친결혼으로 쌓이게 되었다. 현재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순혈주의가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양극단의 정치, 세계 전쟁을 일으키는 민족주의,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는 자본주의 시스템 등 말이다. 여기에 대한 대안은 다양성이다. 사회는 점점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TV 채널도 100가지가 넘고 거기에 SNS까지 포함하면 수많은 채널로 다양성을 볼 수 있다. 다양함은 건강함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지금의 바나나는 한 가지 종이다. 만약 이 바나나를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지금의 바나나는 지구상에서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바나나가 있으면 그 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바나나가 있어 지구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가 만든 사상 중에 중요한 이론은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생명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탄생된 생명체에 대한 이론이다. 진화는 적자생존이다. 적자생존이 되기 위해서는 적자가 탄생할 수 있는 다양함이 존재해야 한다. 

 

만약 이번 전시회 가서 명화를 감상하려 한다면 이 책을 보거나, 목차에서 언급된,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베첼리오 티치아노, 엘 그레코, 디에고 벨라스케스, 주세페 아르침볼도, 아돌프 폰 멘첼,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토머스 로런스,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인터넷에서 찾아 보고 전시회 그림을 감상하면 더 좋을 것 같아 이 책을 추천해 본다. ​ 

 

김종일/ 비앤에이치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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