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거벗은 임금님?
<벌거벗은 지금>, 리처드 로어, 이현주 옮김, 바오로의 딸, 2018
임금님(王)은 천지인(天地人-三才)을 관통한 자다. 그는 거리낌이 없고, 보대낌이 없으며,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다. 그저 벌거벗어 활연관통(豁然貫通), 막힘이 없다. 그래서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관통(貫通)한 인간(人間)으로 산다. 왕(王)은 벌거벗은 지금(Here & Now)을 산다. 그는 현존(現存, Dasein)이다. 마음에 걸려 체증을 느끼는 ‘이것 아니면 저것’ (either and or)의 이원적(二元的)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both-and)인 비-이원적(非-二元的)으로 산다. 그가 누구인가? 관상(觀想, contemplation)하는 자이다. 관상은 순간을 비-이원으로 보는 것이다. 본디 그 말은 단순히 ‘기도’를 뜻하는 말이었다.(13)
기도는 지금 여기에서 하늘나라를 연습하는 것이다. 본질적인 종교체험은 스스로 특별하게 무엇을 아는 것보다, ‘통째로 알려지는’ 것이다. 이 새로운 방식의 앎을 ‘관상’, 혹은 ‘비-이원적 사유’, 내지는 ‘제3의 눈으로 봄’이다.(26) 기도는 숨결(호흡)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부름에서 시작된다. 야훼(Yahweh)는 히브리어로 신성한 자음 YHWH(요드, 헤, 와우, 헤)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발음이 불가능한 이름이었다. 그것은 본디 입술과 혀로 발음되는 이름이 아니라, 코로 ‘숨 쉬어지는(breathed)’ 이름인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맨 처음 한 일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숨-쉼)이었고,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숨-거둠)이다.(29) 관상기도는 숨통을 틔우는 일이다. 기도의 스승들은 늘 말해왔다. “네 숨과 있으면서 숨에 마음을 모아라.” 그 숨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창2:7) 바로 그 숨이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으로 거둔 그 숨(요19:30)이며,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평강을 빌어준 때의 그 숨(요20:22-23)이다. 그 숨, 바람, 영이 정확하게 ‘없는 것nothing’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everything’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30)
제3의 눈(관상)을 뜨고 싶지 않은가? 더욱 폭넓게 보는 관상은 전체 장(場)을 언제나 열어 놓는다. 그것은 어느 순간이나 사건 또는 사람 앞에서, 그것들을 분석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려 하기 전에, 한없이 유약한 상태를 유지한다. 관상가들은 자신의 에고를 만족시키고자 거짓 이분법으로 서둘러 대상을 쪼개려 하지 않는다. 관상은 ‘전방위적인 앎(非합리적인 앎이 아니라, 동시에 前합리적이고 無합리적이며 超합리적인 앎)’이다. 관상은 다른 쪽 실체를 볼 수 있도록 가슴과 머리 공간을 충분히 열어두는 수련이다.(42) 여기에서 하나님의 현존 경험이 이루어진다. 현존은 생각하는 마음 바깥에서, 서로 동참하는 관계 안에서 경험된다. 마음이 ‘벌거벗은 지금’에 현존한다. 침묵, 그냥 가만히 있음이다. 토마스 키팅은 침묵만이 하나님이 첫 번째 언어라 한다. 실질적으로 침묵과 하나님은 동시적으로, 차라리 동일한 것으로 경험된다.(69)
관상의 길은 좁고도 비좁은 길이며 좁은 문이다.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위대한 영성은 왠지 모르지만 놓아버리기와 연관된다.(84) 벌거벗은 지금을 요구한다. 관상기도는 ‘울림resonance, 共鳴’이다. 영성생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거기 있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조율하는 것이 전부다.(135) 자신을 지금 여기에 ‘벌거벗은 채’로 내어놓고, 그로써 자신 안에서 눈을 뜬 내 우주적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자는 행동이다.(136) 벌거벗은 지금(The Naked Now), 관상(contemplation)하는 자가 왕(王)이로소이다.
전승영 목사 (한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