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황학주, 문학동네, 2019
한 해가 시작되면 독서를 다짐하고 책 목록을 길게 뽑는다. 욕심껏 어렵고 좋은 책들을 잔뜩 뽑아놓고 질려 버리는 경우도 많다. 한 해의 독서살이를 잘 꾸리려면 가장 중요한 건 첫 책, 한 해의 초입에서 봄이 오기까지 읽는 책이다. 한 해의 첫 책으로는 시집이 좋다. 한 손에 잡히는 사이즈라 패딩 주머니나 코트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다. 무거운 옷가지들 속에서 얇고 작은 사이즈의 책을 꺼내 따뜻한 카페 안에서 나른하게 읽어도 좋고 연하장이나 설날 소식을 전할 때 몇 줄 인용해 적어도 좋다.
그런 실용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한 해의 시작을 낭만적으로 시작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올 해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지, 즐기고 살아야지, 잘 살아야지, 결심하다가도 꽃샘 추위가 오고 여름 더위가 오면 점점 더 사나워 지는 게 사람살이인데 시작이라도 낭만적으로 해야 덜 인상 찌푸리고 살지 않겠나. 시집의 시들은 짧아서 노랫가사처럼 어떤 것들은 한 해 동안 입에 머물기도 하고 잊어버렸다가도 다시 찾아 읽으면 상기되기 쉽고 서사가 길지 않아 몰입도 쉬우니 여러모로 일 년 내내 시집을 반복해 읽어도 좋을 것이다.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는 삼십 오년 동안 부지런히 시를 써오는 황학주 시인의 2019년도 시집이다. 먼저 제목에서부터 가슴이 저릿하다. 수많은 사랑의 종류와 정의들 중에서 가장 절박한 말이다.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이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바란다. 사랑을 찾는 일은 또한 살려달라는 말이라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살아가고 있으며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지금 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해 보며 단정한 시집 하나를 손에 쥐면 한 해를 꽤 충만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시집의 1부부터 5부까지 붙여진 소제목들도 서정으로 마음에 남는다. ‘약여히 당신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1부의 제목은 <여기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시에 마지막 연이다.
당신에게 화를 내기엔
약여히 당신을 살아본 적이 없다
지난 해를 반성해 보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많이 화를 내었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나에게 숱한 화를 내었다. 화를 내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씁쓸했었다는 것을 미처 떠올리기도 전에 또 짜증을 내던 날들이 대략 일 년인데, ‘바람이 먹고 얼룩지고 지워지며/지나는 여기엔/시간이 많지 않다’. (같은 시 8연) 코로나로 많은 생명이 떠났고 시간제한과 거리두기로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 한 해였다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또 세상을 급하게 떠난 소식들도 줄을 이었다. 예기치 못한 바람이 불어 달력의 날 일자가 날아가고 지워지는 이 세상에 시간이 많이 않은 것은 비단 시인에게만 한정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약여히, 생생하고 또렷히 당신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 당신에게 화를 내기엔 부족한 우리, 다시 한 번 사랑할 한 날이 주어지는 것을 고맙게 여기며 무슨 말을 해 줄까 시집의 시어를 배워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집은 사랑과 또한 하루 하루 사는 삶과 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제주에 살고 있는 시인의 낙조를 보며 ‘이제, 물끄러미/썰물 뒤로/이렇게 하루를 미루는 것이고/다른 한 손으로 어떤 하루를 살살 돌려보내는 것이기도 하리’(<검은 여에 와서>, 10연)라 표현한 매일매일,‘ 오늘까지는 변화가 빠진 것 같고/내일부터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하루>, 6연)는 하루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사랑과 생으로 약여히 잘 살 것인지 짧고 강렬한 싯구들을 읽으며 낭만을 준비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람이 있다는 신호가 간다>, <행복했었다는 말>, <내가 어떻게 네게 왔다 가는가>, <나는 흐르네>처럼 제목만 어디에 적어 놓아도 좋을 법한 시들도 가득한 시집의 여백에 감상을 간단히 적어 놓았다 늦여름이나 가을쯤이나 혹은 올 해가 다 갈 때쯤 다시 읽으면 아마 2022년의 서정과 낭만을 회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사랑은 무엇과도 달라야 한다’(<사려니숲길을 가는>, 2연 중)는 시인의 말을 되새겨 보기를 권한다. ‘하루치 재난을 훔쳐/십자목에 달린 두 팔과 두 다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하루>. 8연)에서 저절로 떠올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올 해는 너무 과장되지도 가볍지도 않게, 그렇지만 살려달라는 말을 들을 것처럼 나눠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박창수 목사 (선한목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