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성복, 문학동네, 2012)
시인의 말은 가끔 폐부를 찌른다.
“생각해보라.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244쪽)
어떤 이는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으나 시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고통을 참아내는 일이 나뭇잎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많은 이들이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필수적인 것처럼 말하지만 극심한 고통은 홀로 감내할 경우 사람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그 고통이 상처로, 사람을 망가뜨리는 경험으로 남지 않게 하는 것은 결국 참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놓는 것에서 해결된다. 한 줄의 짧은 글에 이끌려 이 책을 구입하고 말았다. 서점에서 지나다 우연히 본 책 제목 때문에 책을 사는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짧은 한 줄의 글에 멈춰서서 그렇게 오래 곱씹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성복 시인은 <정든 유곽에서>라는 시집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시인이었으나 시가 아닌 아포리즘이라는 형식을 빌어 쓴 이 책은 시와는 달랐다. 아포리즘은 철학자 니체가 애용하던 글쓰기의 형식으로 명언, 격언, 잠언, 금언과 같이 교훈을 주는 말 또는 사물의 핵심과 이치를 표현한 문장을 일컫는다. 니체의 책은 딱딱하고 논리적인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다. 시인의 글도 마찬가지다. 물론 삶의 본질에 닿는 글은 딱히 논리적이지 않다. 삶이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순과 역설이 가득한 삶을 이야기하는데 논리적인 글이 무슨 소용일까? 게다가 모순과 역설이 가득하다 하여 삶이 절망적이거나 불행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절망하지 않을 가능성을 가진 것이 삶이다. 언제든 논리를 벗어난 소설같은 만남도, 기적같은 변화도 가능한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또는 주변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각성을 통해 변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채 살아간다. 그렇기에 희망이 끊어졌다 여기는 순간에도 다른 희망을 꿈꾼다. 시인은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절망은 허위다. 살아있으면서, 살아있음을 부정하는 것”(226쪽)이라고 말한다. 또 “절망은 ‘바닥 없음’으로서만 절망일 수 있다.”(163쪽)고도 말한다. 정말 끝도 없는 무저갱이 아니고서야 사람은 기어나올 희망을 품고 방법을 찾지 않겠느냐는 말이기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책은 짤막한 글들이 모인 얇은 책이지만 사실 하루아침에 읽을만한 내용은 아니다. 아포리즘은 알다시피 곱씹을 때 더 깊은 맛을 낸다. 오늘 읽어서 가슴에 와닿지 않았던 이야기가 삶의 다른 자리에선 깨달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은 불현듯 찾아온다. 10.29 참사를 지나기 전까지 “한 사람의 상처는 모든 사람의 상처다”(120쪽)라는 글귀를 읽으며 그저 그런 글이 있구나 했었지만 2022년 10월 29일을 지나고 난 후의 나는 이 한 줄의 짧은 문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청년들의 죽음과 애통해하는 유족들의 울음소리에 함께 북받치는 가슴을 보며, 결국 저들의 상처가 나의 상처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도없이 슬피우는 이들의 곁에서 결국 “상처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다.”(121쪽)라고, “사랑이 없는 곳에 지옥도 없다.”(63쪽)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두고 가끔 꺼내어 읽으면 좋을, 가끔 멍한 정신으로 살아갈 때 뒤통수를 세게 후려쳐서 번쩍 정신이 들게 만드는, 그리고 조용히 읽을 때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책을 한 권쯤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성복 시인의 이 아포리즘은 어쩌면 그렇게 두고두고 읽어 볼 만한 책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꼭꼭 씹어 삼키고 소화 시키면 어느샌가 불쑥 필요한 상황에 튀어나와 마음을 환기 시킬 테니 말이다.
임준형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