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사람을 위한 특별한 서비스
<죽은 자의 집청소>, 김완, 김영사, 2020
책을 펴고 혼란스러웠다. 가을이 되었으니 죽음에 대해 고찰해보자며 교인들과 함께 나눌 심산으로 선정한 책이었다. 미리 내용도 숙지하지 않고, 제목이 주는 강렬함에 속아 무작정 집어든 책이었다. 나 자신의 feeling을 믿으며... 교인들에게 죽음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짜릿한 자극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은 조금 더 엽기적인(?) 방식으로 흘러갔다. 책을 읽는 내내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밤에 읽으면 끔찍한 장면이 꿈에도 나왔다. 누굴 탓하랴!
작가는 죽은 사람의 집을 청소하는 ‘특수청소부’이다. 특수청소부? 이름이 괜히 거창하다. 아무도 손대기 싫어하는 오물이나 동물의 사체, 자살현장 등을 치워주는 사람이다. 특히, 자살 후에 방치된 시체나 고독사 현장을 정리하는 일이 에피소드의 주를 이룬다. 쓰던 물건을 정리하고, 핏자국을 닦아내고, 생전의 체취부터 부패해 썩은 냄새까지 한 사람이 남기고간 모든 흔적을 없애는 것이 작가가 하는 일이다. 그는 “누군가 홀로 죽으면 나의 일이 시작된다”고 자신의 일을 소개한다. 아이러니한 말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이 이어진다니!
책에는 현실이라 믿기지 않는 소설같은 에피소드가 녹아져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다. 불을 피워 자살한 한 여인의 집청소를 위해 내부로 들어갔다. 이상한 것은 자살에 필요한 재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장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착화탄 재를 쓸어 담으며 ‘왜 아무런 장비가 없을까’ 궁금해졌다. 의문은 분리수거함을 정리하면서 풀렸다. 죽은 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토치, 부탄가스 캔은 고철 칸에, 화로의 포장지와 택배상자는 종이 칸에, 부탄가스의 빨간 노즐마개는 플라스틱 칸에 착실히 담아두었다. 자살 직전에 벌어진 분리수거의 현장!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독기 어린 결정을 해놓고, 무슨 생각으로 이걸 친절히 정리했을까? 세상을 향해서는 너무 착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너무 빡빡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을까?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더러우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이다. 작가는 페트병에 담긴 오줌통을 치워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다른 청소라면 서둘러도 꼬박 하루가 걸리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오줌통을 치우는 일은 반나절, 아니 몇시간이면 끝날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웬걸. 집 안을 가득 매운 오줌통을 변기에 따라버리는 일은 말 그대로 막노동이었다. 맥주병처럼 밝은 갈색을 띈 패트병을 변기에 부을 때마다 부글부글 가스와 기포가 올라왔다. 열 개중 한두 개 꼴로 “펑” 샴페인처럼 오줌이 터져나왔다. 말 그대로 “오줌 페스티벌”을 벌인 이야기도 있다.
이 밖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현장에 남겨진 ‘쌍쌍바’ 이야기. 자살 직전, 청소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고 전화했다가 자살계획이 탄로나 실패한 이야기. 한 중년 남성이 청소 견적을 물어왔는데, 알고보니 자신이 자살 한 후에 집청소를 맡기려했던 이야기. 일상에서 마주할 수 없는 죽음의 언저리에 있는 이야기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이해가 안되는 것 같다가도 공감이 되고, 그러면서도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찝질하고, 불편했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면서 묘한 재미가 밀려왔다. 죽은 사람이 남기고간 흔적이 단서가 되어, 그 사람의 생生과 삶과 사死가 어떠했는지를 증거해준다. 저마다 죽음의 이야기는 다양하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모두가 흔적을 남기고 떠났다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죽지만, 떠날 때는 삶의 흔적이 있다. 무엇을 소중히 했는지, 어디에 집착했는지, 무엇과 타협할 수 없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까지.
과연 나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내가 떠난 자리를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마지막까지 내가 남기고 싶은 것과 지우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죽은 이의 단서를 통해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역시, 죽음은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죽음을 들춰본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죽음은 ‘그들’의 죽음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누군가의 죽음을 접한다. 마침내 나도 죽겠지만 스스로의 죽음은 경험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상의 모든 죽음은 타자적이다.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되뇌여야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것은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고 점검하기 위함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다.
당신은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신동훈 목사 (마포 꿈의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