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
<카인>, 주제 사라마구, 해냄, 2015
“그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 모든 인간에게 가장 공평한 것이 죽음이라지만(이 말이 사실인지는 의문입니다. 그가 살아 온 삶의 질, 죽음을 기리는 애도의 방법에 따라 죽음의 질도 달라지는 게 현실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죽음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이 질문이 떠오릅니다.
나이에 맞지 않은 이른 죽음이라던지, 전쟁과 혐오에 의한 학살 범죄라던지, 어이없는 인재로 빚어진 참사라던지. 이해하기 어려운 모든 죽음에 대해 “그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 묻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향해서도 이런 질문을 던진 작가가 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자신의 유작 <카인>에서 성경에서 벌어진 수많은 죽음들에 대해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소설 속에서, 카인은 아벨을 죽인 죄로 세상을 유랑하는 벌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카인은 시공을 초월해 성경 속에서 죽음이 벌어졌던 여러 현장을 유랑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현장에 개입하고, 황금 송아지에게 절한 죄로 삼천명이 몰살하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심판받는 현장에도 있었고,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간이 여리고의 재물을 편취한 죄로 그 가족이 몰살당하는 현장,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침략해 아모리 족속을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몰살하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유랑한 곳은 여호와께서 타락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한 현장이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타고 있던 카인은 영문도 모른채 수장돼버린 수많은 생명으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그 죽음들 속에서 카인은 여호와께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할 방법이 이삭의 죽음 밖에 없었습니까, 욥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그 자녀를 희생한 것은 온당한 일입니까. 타락한 어른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까지 심판하셔야 했던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앞 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한 민족을 인종청소하는 일이 합당합니까.
<카인>이 던지는 질문은 매우 불경하고 도발적입니다. 주제 사라마구가 2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도 리스본의 종교 재판장에서 화형으로 다스려졌을 일입니다. 그러나 <카인>의 질문은 불경을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 2000년 동안 미뤄왔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 이 질문은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어떤 죽음과 폭력은 당연하게 여기고야 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성경에 그려진 죽음들을 질문없이 받아들이는 사이에 끔직한 폭력성을 내면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차별하고, 혐오하고, 죽어 마땅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당하는 생명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신앙이 폭력으로 표현된 사례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박해 받은 역사를 기억함과 동시에, 박해했던 역사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절망과 죽음을 신앙의 승리로 환호했던 역사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는 우리의 신앙이 폭력으로 발현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드시 반복됩니다.
예수께서는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의 손에 살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대어 사는 일은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이 폭력의 근거로 삼았던 무자비한 죽음의 이야기들과 결별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와 같은 폭력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이 승리한다는 선언입니다.
또다시 “그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 물어야 하는 불행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질문 앞에서 비겁하지 않을 용기와 희생자들과 함께 아파하는 공감능력입니다.
우동혁 목사 (만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