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와 구원에 이르는 가장 성서적인 방법
<매주 오경 영성 읽기>, 조너선 색스, 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 2022
“위대함은 삶을 바깥으로 향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고난이 당신 자신의 고난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삶이다.”(260)
확신에 가득 찬 사람과 마주하는 일은 불편하다. 수차례 반복된 경험으로 혹은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얻은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선험적으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경우라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곳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시인의 노랫말을 이제는 그만 떠올리고 싶지만, 좀처럼 그게 지워지지가 않는다. 꽃 한송이 없는 황폐한 땅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까닭일까.
신앙이란 무엇일까. 진득하게, 또 진정성 있게 그 답을 만들어가는 일은 흥미롭다. 아마 목사로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연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모방과 짜깁기를 하면서도, 기존의 어법을 따르지 않으려는 경향 때문에, 연세가 있으신 교우분들께 송구스럽다. 부족한 설교자를 만나, 설익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 곤혹스러울 터다. 이 어긋남이 긍정적인 하모니로 승화되기를 기도할 수밖에 내게는 다른 도리가 없다.
랍비 조너선 색스, 그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차이의 존중>, <사회의 재창조>는 수년 전에 출간되어 사회과학서적으로 분류되었다. 양서라서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다. 그 때 조너선 색스의 성경이야기를 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연속물로 번역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적잖이 반가웠다. 설렘과 흥분을 안고 <매주 오경 영성 일기>를 읽었다.
조너선 색스의 <매주 오경 영성 읽기>는 모세오경(토라)을 개괄하는 서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신앙이 무엇인지를 해설하는 책이라고 약술하고 싶다. 주옥과 같은 글이다. 천지창조기사를 비롯해 신화적 색채가 짙은 이야기도 그렇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출애굽 사건도 그렇고,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들로 모세오경이 구성된 덕분도 있지만, 그 이야기들을 현대인들의 일상에 비끄러매는 저자의 기지에 찬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식을 참으로 사랑하는 부모는 그 자식이 그 자신의 정체성을 발전시킬 공간을 만들어준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만드는 공간이야말로 사랑이 햇빛처럼 꽃을 비추는 것이다. 나무처럼 그 아래에서 자라는 식물에게 그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하나님에게 사랑의 역할은, 아일랜드의 시인 존 오도나휴의 사랑스런 표현처럼 “우리들 사이의 공간을 축복하는 일”이다.”(53~4)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 전승에 따르면, 창조의 시발점은 하나님의 자기 비움이다. 조너선 색스가 이 사건을 통해 호소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뿌리 깊은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탈주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출애굽 사건은 또 어떠한가. 기억 자체가 곧 책임의식이 되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돌로 만든 집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머무신다고.
“우리가 우주의 중심에 자아를 놓으면, 마침내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우리 목적의 수단으로 둔갑시킨다. 이것은 그들을 작게 만들고, 그것은 또 우리를 작게 만든다. 겸손은 우리보다 큰 것의 빛에 의해 사는 걸 뜻한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계시면, 우리는 창조세계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아름다움에 자신을 개방한다. 자아가 작아질수록, 세상의 반경은 넓어진다.”(346)
자아로 가득 찬 사람이 저지르는 우는 타자를 도구화한다는 것이다. 이보다 절망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고통당하는 누군가를 향해 공감하려들기보다 판단하고 정죄하려 할 때, 똑같은 인간으로서 좌절감에 사무친다. 반복되는 그런 상황들이 신물 난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역자 김준우의 말마따나, “고통을 함께 나눌 때 치유와 자유, 구원이 [시작된다.]”(72쪽 역자주 중) 성경이 증언하는 참 자유와 참 구원을 우리는 언제쯤 맛볼 수 있을까. 고운 자태를 뽐내는 꽃들을 우리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
김민호 목사 (지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