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책감, 인류 최후의 방어선.
(<쥐> 1-2권, 아트 슈피겔만, 한마당출판사)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생각하고 있었다. 만화형식이면서도 여느 문학작품을 뛰어넘는 작품성, 구성력, 예술성으로 움베르트 에코의 찬사를 받은 이력이 있는 책이지만 요즘 세대에게는 덜 알려진 책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점점 인류적 재앙에 무뎌지고 있는 것이 마음 아파 다시금 제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작품을 들여다보고자 했던 것이다.
때마침 귄터 그라스의 <고양이의 쥐>도 떠올랐다. <쥐>의 동물 모사(유대인은 쥐, 나치 독일인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로 분한다.)처럼 나치 시대 독일의 작은 마을, 이념과 상관없는 듯 상관있는 듯, 전 인류적이면서도 또한 친구 사이 관계에서의 고양이와 쥐의 관계에 빗댄 이 훌륭한 소설은 독일인 귄터 그라스의 ‘죄책감’에서 기인된 작품이었다.
그리고 날씨가 참 좋던 10월의 마지막 주말, 이태원 참사의 현장이 여과 없이 방송되는 것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10대, 20대, 아직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려 인간 더미를 이루며 서로의 무게에 짓눌려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목격자들의 현장 증언이 잇달았다. cpr를 하며 골목길 여기저기에 뉘인 아이들을 정신없이 돌보고 있는 와중에도 사람에 대한 존엄성과 생명 존중은 온데간데없이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밀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이들에 충격을 받은 의료지원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인간에 대한 혐오가 들었다는 말도 있었다.
난데없는 눈물이 핑 돌았다. 전쟁, 정쟁, 크고 작은 갈등과 사고, 참사까지 결과는 각각 다른 형태로 나왔지만 모든 것이 다 ‘인류애’, ‘인간성’, ‘사람 인(人)’자가 들어간 마음과 생각과 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에 이같이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 <쥐>와 <고양이와 쥐>에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 ‘죄책감’의 중요성을 통감했다.
죄책감, 죄에 대한 책임감이다. 양심의 바로 옆에 자라나는 죄책감은 행동의 선행에 발휘되는 양심의 후행적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죄책감은 사건, 또는 행동 이후에 수반되는 양심의 형태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부채의식, 책임의식이 함께 들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죄책감을 버거워한다. 그래서 책임을 떠넘길만한 것이 있으면 본인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책임은 전가해 버리거나 사건, 행동 자체를 죄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 원죄, 죄의 뿌리, 끊임없이 죄성을 부추기는 악한 세력, 사탄과 마귀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없이는 죄에서 구원받을 수가 없으며 구원받아 거듭났다 하더라도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우리의 죄성과 세상의 악한 유혹과 싸워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성, 인류, 인문학적인 사건에서 직접 가해자가 아니더라도 가책을 느끼고 책임감을 느끼고 함께 슬퍼하며 또 분노하고 아파한다. <쥐>는 이러한 죄책감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다음은 만화의 말풍선 대사만 따온 것이다.)
파벨(작가의 정신과 주치의) : 어쩌면 당신 부친은 자신이 항상 옳았다는 걸 그러니까 항상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거에요. 왜냐면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을 테니까요. 그리고 부친은 안전해지자 그 죄책감을 진짜 생존자인 당신에게 떠넘긴 거에요.
슈피겔만 : 음... 말씀해 주세요. 선생님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세요?
파벨 : 아니요... 그저 슬플 뿐이지. 당신은 부친께서 살아남은 것을 존경스럽게 생각합니까?
슈피겔만 : 아... 물론이죠. 운이 많이 개입됐다는 건 알지만 아버진 놀랍도록 현실을 직시하셨고 수완이 대단했죠.
파벨 : 그래서 생존을 우러러볼 만하다고 생각하는군요. 그렇다면 살아남지 못한 건 우러러볼 만하지 않다는 뜻입니까?
슈피겔만 : 아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마치 사는게 승리고 죽음은 패배라는 식이죠.
파벨 : 맞아요. 인생은 늘 산 사람의 편이죠. 그래서 무슨 이유인지 희생자들은 비난을 받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최선의 인간이 아니었듯이 죽은 사람들도 최선은 아니었죠. 무작위였으니까요! (<쥐> 44-45P)
<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생존자인 아버지를 둔 작가,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에게 생생한 증언을 들으며 당시의 참상을 재현해 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동시에 작가가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들으러 방문하면서 겪는 부자간의 갈등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그리면서 느끼는 작가 개인의 심경까지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홀로코스터 생존자를 주인공이자 화자로 두는 보통의 전후문학과는 다른 구성을 취한다. 작가는 살아남은 아버지의 몸에 배어 있는 습관들, 트라우마로 야기된 관점들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것을 극복해 보고자 노력하는 작가와 또 다른 생존자인 정신과 전문의 파벨과의 대화는 그동안 「쥐」에서 주목받던 전쟁 참사의 내용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바로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또한 인류의 유지에 대한 이야기기이도 하다. 아트 슈피겔만의 죄책감,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 그 덕분에 우리는 양심에 기대어 인류애를 모조리 지워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지속하지 않는다. 작가는 <쥐>를 그리면서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몸부림친다. 위에 인용한 대사는 작가가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를 묘사하기 힘들어 하던 때에 그려졌다. 모두 같은 종(種)인 인간이라는 점만으로도 사건에 가담한 것 같은 죄책감을 자극한다. 실제 그 상황에서 살아난 생존자는 아니라도 동시대에 살고 있고 같은 국민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함께 가책을 받고 슬퍼한다.
죄책감은 무거운 것이다. 직접 가해자가 아니니 벗어나고 싶고 잊고 싶고 주 책임자에게 모든 책임을 물리고 싶은 심정이 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된다. <쥐>는 이러한 고민과 함께 그려졌다. 어쩌면 그의 친모가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본격적으로 자신에게 전가된 죄책감의 실행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유대인 아버지가 겪은 수용소 생활과 폭력과 죽어나간 유대인들의 참상은 계속 우리에게 같은 죄책감의 유대를 쌓는다. 덕분에 우리는 ‘인종차별’에 대한 범인류적 가치를 세우고 인류애의 한 부분을 지탱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매일은 참상의 생존이다. 국가적인, 인류적인 사건의 유대로서, 또 크고 작은 개인의 참상에서의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게 다치는 인류애, 인간성, 점점 커져 나가는 인간혐오, 잃어버리는 양심에서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죄책감을 수용하고 인정하고 그것을 인류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짧은 시를 인용하려 한다. 죄책감, 그 책임감을 받아들일 때 우러나오는 인간성이 다시 한 번 세워지기를 바라면서.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 1944-
박창수 목사 (인천성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