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그리스도인이오?
(<파란>, 정민, 천년의 상상, 2019)
2021년 한국천주교회 표어는 ‘당신이 천주교인이오?’이다. 이 슬로건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 전 관아(官衙)에서 심문당할 때 받은 ‘질문’(1846.8.26. 김대건 옥중서간)에서 따온 것이다. 김대건은 어둠이 가장 깊던 시대에 앞서 걸어갔던 흔들리는 등불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그리스도교 사제 김대건이 태어난 지난해, 한국천주교는 대림절 첫째 주일을 시작하면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살이’를 선포하였다. 코로나19 시대의 파장이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프로그램은 역시 순례였다. 그의 길을 함께 걸으며 따르자는 의미일 것이다. 김대건의 숨결을 품은 솔뫼, 새남터, 미리내가 대표적이다.
최초의 신부에 대한 기억과 기념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청년 김대건은 16살에 신학생으로 뽑혀 마카오로 유학해 6년간 신학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25살에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으로서 첫 신부가 되었다. 귀국한 그는 1년 동안 서울과 용인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중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황해도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헌에게 체포됐다. 그리고 신부가 된 지 단 1년여 활동 끝에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효수됐다. 지금의 용산 모래밭이었다.
<파란>은 김대건을 낳은 조선천주교회의 피 묻은 역사적 배경을 다룬다. 책은 이렇게 묻고 있다. “세상을 바꾸고자 한 다산(茶山)의 생각은 어떻게 잉태되었을까? <파란>을 다 읽고 난 후 여운이 깊어 같은 주제를 다룬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덕일)을 들추어냈다. 이미 15년 전에 나온 쌍둥이 같은 목록이다. 두 책은 역사와 문학의 차이만큼 간극이 크다. 그럼에도 다산의 천주교 신앙을 다룬 한학자 정민과 역사가 이덕일의 솜씨는 차이보다 공통점이 많다. 무엇보다 두 저자는 다산이 만난 정조와 천주교, 두 하늘에 대한 애정으로 천착한다.
18세기 말 실학을 탐구하던 유학자들은 서학(西學)을 만났고, 진리라고 여겼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주인공은 당시 남인의 선비들로 재기 넘치는 천재들이었다. 그들은 다산 삼형제를 중심으로 이벽(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승훈(누이의 남편), 윤지충(외사촌), 황사영(큰형 정약현의 사위) 등 정약용의 가족관계가 중심이다.
조선천주교회는 1784년 설립 이전에 자생적으로 출발하였다. 출발은 이벽의 주도로 10일간 열린 천진암 강독회였다.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1779년 이벽(25세), 정약용(17세), 정약종(19세), 정약전(21세), 이승훈(22세) 그리고 권철신(44세)은 폐허가 된 천진암에 모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였다. 천진암이 한국천주교 발상지로 불리는 배경이다.
이벽의 설득으로 동지사(冬至使)인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간 이승훈(베드로)은 조선의 첫 세례자가 되었다. 이벽(세례자 요한) 자신은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첫 천주교 신자들은 대단히 지적이고, 조직적이며, 헌신적이었다. 그들의 의연함을 보면 숨이 막힌다. 중국의 주자학을 하늘처럼 섬기던 당시 완고한 지배체제는 천주학의 작은 불씨조차 조선사회와 지배 권력에 대한 도전이자,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천주교도는 마땅히 멸절해야 할 대상이었다. 파란은 그런 위기와 위험 그리고 순교를 다룬다.
다산은 벼슬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1797년 동부승지에 임명된 정약용이 정조 임금에게 올린 글을 보면, 곡진한 소(疏)의 형식을 취하였으나, 실상은 ‘사상 전향서’와 다름 없었다.
“애당초 그것에 물이 들었던 것은 아이들 장난과 같은 일이었으며, 지식이 성장한 뒤에는 그것을 적이나 원수로 여겨, 알기를 분명히 하고 분변하기를 더욱 엄중히 하여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실로 남는 찌꺼기가 없습니다.”
조정을 장악한 노론 벽파가 왕의 친위세력인 시파를 견제하려고 정약용 가계의 천주교 이력을 집요하게 공격하자, 정약용으로선 자신의 정치생명은 물론 일가(一家)의 목숨까지 위협할지 모를 ‘사상 문제’를 차제에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1800년 총애를 주던 후견자 정조가 죽자 정약용은 거듭 옥사에 휘말린다. 이번엔 형 약전, 약종과 함께 혹독한 추국을 당하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다산은 과거의 행적과 사상을 거듭해 부정하면서 배교를 거부한 형 약종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영세를 준 매형 이승훈을 저주하였다. 심지어 천주교도 색출법을 자청해 조언하고, 조카사위 황사영을 고발하였다. 전향의 진정성을 입증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정조 사후 다산은 ‘여유당’(與猶堂)이란 호를 지었다. 본래 ‘여’(與)와 ‘유’(猶)는 모두 짐승의 이름으로, ‘여’는 의심이 많고, ‘유’는 겁이 많은 동물이다. 여유당은 ‘신중하기(與)는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하고, 삼가기(猶)는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란 뜻이다. 다산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잘 알 듯하다.
신앙 이전에 정치적 목숨을 노리는 박해와 혐오의 시절, 정약용 삼형제의 갈림길은 극적으로 나뉜다. 배교를 여러 차례 선언한 맏이 정약전은 흑산도로, 셋째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당한다. 그러나 둘째 정약종은 당당하게 순교한다. 약종은 자기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집안과 관계를 끊고 살았다. 그의 순교 과정에는 치명적인 감동이 있다.
1801년 2월 11일, 금부도사 한낙유는 정약종을 체포하러 마재로 가다가 마주 오던 정약종 일행을 지나쳐갔다. 정약종은 종을 보냈다. “가서 누구를 잡으러 가는 길이냐고 묻고 혹시 나를 잡으러 가는 길이라면 더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말을 전하라.” 그렇게 스스로 잡힌 정약종은 당당한 순교를 선택하였다. 아들 정하상은 겨우 7살이었는데, 그 후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믿음을 지키던 중 39년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교에 동참하였다.
1827년, 65세의 노인이 된 정약용은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와 시를 지으며 옛날을 회고하였다.
“이곳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사이로 난 실 같은 오솔길은 내가 어린아이 적에 오르내리며 놀던 길인데, 여기서 우리는 중용, 대학, 서전, 주역, 즉 상서를 다 외운 후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시는 소련(燒鍊)을 하였다. 더욱이 저명한 호걸들과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
누구나 정약종과 정하상 그리고 김대건처럼 성인이 될 수는 없다. 외려 두려움과 부인, 갈등과 배신은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용기로 자신이 품은 믿음을 떳떳이 고백한 치열한 삶은 부활신앙의 증거가 되었다. 참 신앙은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현실을 변화시킨다. 세상을 이긴 믿음의 선배들 앞에서 자문자답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오?”
송병구 목사 (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