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홀로 맞서기
<하얼빈>, 김훈, 문학동네, 2022
김훈의 소설은 외세, 특히 일본과의 대결 접점을 파고든다. 그래서 오늘의 세태에 더욱 문제작이다. ‘안중근 신문과 공판 기록은 소설적 재구성을 용납하지 않는다’며 그대로 옮겨 적는 식으로 역사의 기록이 말하게 해주는 서술방식도 감동이지만, 기록 행간에 있는 안중근의 고뇌가 단순 직필로 읊조리듯이 뇌까려지는 부분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그 감정을 탈피하고 흐름을 따라 소설의 한계를 느끼면서 씨름했을 작가의 고뇌가 뚝뚝 묻어나는 신간이 반가워 멈춰 앉은 다섯 시간이 황홀했다. 그리고 더 긴 시간 동안 뜨거웠다.
도장 몇 개로 조선 역사와 강토를 잠식한 을사늑약 이 후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을 겁박하고 능욕하는 장면들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숨을 죽이며 한 장씩 넘겼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행적을 교차해가며 빠르게 진행하는 기술 방식은 지도 위 작전처럼 섬세하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임박한 여섯 칸 특별 열차의 속도처럼 거사를 준비하는 안중근과 우덕순의 말수 적은 일주일을 빠르게 훑어가는 모양새나 그날, 하얼빈에서의 의거를 손에 들고 단숨에 촬영하듯이 기술해나가는 작가의 필치가 역동적이다.
폐허가 된 고려 왕궁에서 순종과 보도 사진 한 장을 찍어도 망국의 프레이밍을 활용할 만큼 주도면밀한 총독. 대동아 공영권의 야망을 실현 시킬 구상을 품은 채, 적국들을 발밑에 놓고 순시하는 이토 히로부미지만 그를 죽이려는 거사를 앞두고 있는 안중근과 우덕순은 겉보기에 어딘가 단순하고 허술하며 충동적이다. 직관적이라 표현 할 수도 있겠다. 포수와 담배팔이는 <남한산성> 서날쇠를 떠올리게 만든다. 어둡고 음울한 대한제국의 현실과 일제의 무력 앞에 무참히 진압당하는 의병들의 슬픈 최후지만, 그 속에 반짝 빛나는 승리가 있었다. 청과 러시아도 이토의 행차에 긴장해서 의장대를 기차역에 미리 도열시켜놓을 정도인 권세일지라도 안중근의 눈에는 괴죄죄한 늙은이, 오종종한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 유일한 쾌승이다.
환영 인파 속 의사(義士)는 외롭다. 권력 앞에서 알랑거리며 그의 총애를 받으려는 게이샤들 같은 인생들 사이에 홀로 그를 자신의 몸으로 부딪혀 죽이려는 안중근의 무뚝뚝함이 더 고독하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총 쏘는 대목이 클라이막스가 아니다.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하는 장면은 소설 전체에서 간막에 불과하다. 검사의 심문 과정에서 기록으로 남은 안중근의 대답과 동양평화론의 밑바탕이 된 그의 생각이 거침없다. 그것이 절정이다.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려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
작가의 고백이다. 젊은 시절부터 가슴에 품고 있다가 백발이 되어서야 썼으니 간절히 쓰고 싶었어도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서름서름했던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글감을 창고 깊숙이 꺼내지 못하고 못다 쓴 이야기로 남는 경우가 허다하리라. 그 세월이면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소설 속 인물도 작가도 집요한데가 닮았다. 덮쳐오는 시대의 해일에 홀로 맞섰던 안중근이 오늘 김훈을 쓰게 만들었다. 다 전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탈고 후에 쓴 부록에 한때 포수, 오랫동안 무직이었던 안중근을 향한 작가의 심정을 고스란히 고백해 뒀다.
“그가 몸과 총과 입으로 이미 다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의 날선 보도, 백수공권 유생들의 글, 최익현의 말이 그 시대에 그랬듯이 글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무서운 힘이 있다.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면... 그렇게 믿는다면... 홀로 맞설 수 있을까 고민하던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결행하도록 만드는 글의 힘이 무섭다.
신현희 목사 (안산나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