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동 천자문으로 선생님의 세상 이별을 애도합니다
<김성동 천자문>, 김성동, 태학사, 2022
며칠 전 소설가 김성동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다. 나는 김성동 선생님을 잘 모른다. 내 무지와 미력한 독서력 탓이다. 다만 선생님의 <국수>라는 장편소설을 인터넷서점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구매의 여부를 점치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좋은 상태와 가격의 중고서적이 나오길 월척을 기다리는 낚시꾼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상 이별 소식이 너무 아쉽다.
김성동 선생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책 한 권을 붙잡았다. <김성동 천자문>이다. 선생님은 천자문을 첫머리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천자문은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 문인 주홍사가 지은 책이라고 합니다. 황제인 무제가 왕희지 글씨 가운데 서로 다른 글자 1천 자를 뽑아 주홍사에게 주며 “이것을 가지고 운을 붙여 한 편 글을 만들라”고 하였답니다. 1천 자를 가지고 한 자도 겹치는 것이 없게끔 한 편 글을 만든다는 것은 황제 고임을 받을 만큼 빼어난 문인이었던 주홍사로서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하룻밤 사이에 4자 1구로 2백50구를 이루어 1천 자를 채우고 나니, 머리칼이 다 세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 때문인지 천자문을 백수문이라고도 한다. ‘천자문에는 중국 역사를 비롯해서 천문, 지리, 인물, 학문, 가축, 농사, 제사, 송덕, 처세, 도덕과 자연현상에,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제왕의 길과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행정가의 올바른 몸가짐, 그리고 바람직한 인간형인 군자의 길에서 식구와 이웃 사이에 지켜져야 할 예의 범절’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가르쳐 주는 이가 없으면 그저 주문 외우듯 ‘하늘 천, 따 지…’를 읊을 수밖에 없다.
선생님은 천자문을 할아버지께 배우셨다. 책은 할아버님과 함께 얽혀 있는 이야기와 함께 천자문 4자 2구 속에 숨어있는 뜻을 풀면서 선생님의 눈으로 세상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수필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책에서 ‘始製文字(시제문자)하고 乃服衣裳(내복의상)이라’를 독서와 관련하여 풀고 있어 인용해 본다.
“대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근심걱정은 다 책을 읽는 데서부터 비롯되니, 마침내 책을 없이하지 않고서는 세상 근심걱정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 말이 상기도 귓전을 맴돕니다. 할어버지가 한숨처럼 중얼거리시던 말씀이었지요. 그러면서도 다섯 살짜리 핏덩어리를 무릎 꿇려 놓고 수클(한문)을 가르치신 뜻 또한 어디에 있는 것인지, 생각하면 명치끝이 타는 것 같습니다. 명치끝이 타는 것 같으면서 눈앞도 또 부옇게 흐려 옵니다.
<백수문>을 배우던 때로부터 어언 50여 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이 중생은 무릇 몇 권 책을 읽게 되었던가. 아마도 기천 권은 읽지 않았나 싶습니다. ‘남아수독 오거서’라고 하였습니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에 가득 차고도 넘칠 만한 부피 책을 읽어야 한다는 동양 전통적 독서관이니, 비록 기천 권 아니 기만 권 책을 읽었다고 한달지라도 구우일모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지요. 같지 않게 책권이나 읽었다는 것을 감히 흰목 잦히자는 것이 아니올시다. 책이야말로 이 답답하고 힘겹기만 한 티끌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오직 하나 뗏목이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책이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책이 있어 배고프지 않았습니다. 아아, 책이 있음으로 해서 슬픔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마음이 아련하고 슬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혼란스런 세상을 안타까워하신 선생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그런 것인지, 당신의 어두운 추억이 서려서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세상이 안타까운 나도 세상 소식을 끊고 책을 붙잡고 있는 지금, 책이 있어 외롭지도 배고프지도 않고 나와 너, 우리의 슬픔을 달랠 수 있다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어려운 세월 보내신 선생님의 마지막을 이렇게 추며하며 <김성동 천자문>의 책장을 예를 다해 넘긴다.
이원영 목사 (예장통합총회농촌선교센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