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이 말이 될 때
<몸이 말이 될 때> 안희제, 이다울 공저, 동녘, 2022
<몸이 말이 될 때>는 아픈 두 명의 젊은이가 출판을 염두에 두고 나눈 편지를 묶은 책이다. 지은이 안희제와 이다울은 모두 난치병 환자로서 자신의 아픔에 관하여 책을 썼던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고등학교 때 아마추어 배드민턴 선수였던 안희제는 만성 염증성 장 질환인 크론병을 겪고 있다. 이다울은 대안학교 시절, 가을마다 열리는 학교 씨름대회에서 승승장구했다. 히말라야 트레킹도 거뜬히 해냈다. 병을 만나고 삶은 변했다. 급격히 찾아온 몸의 변화가 이 두 사람에게 일으킨 변화는 휴학과 글쓰기이다. 안희제는 “답답하고 억울해서”, 이다울은 “혼란스럽고 불안해서” 질병의 고통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책의 기획은 아픔에 관하여 책을 냈던 아픈 젊은이들이 필담을 나누는 것이었겠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아픔에 얽매이지 않는다. 두 사람의 자기 정체성이 환자라는 단어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두 사람의 필담을 읽는 동안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떠올랐다. 소록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한센병이라는 공통의 분모가 있었지만 그들의 희로애락과 자기 정체성은 한센병이라는 단어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무척 복잡한 존재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크나큰 공통의 분모를 가졌지만 저마다 다른 이유이고 세상이 재미있는 이유이겠다. 둘의 필담은 아픔이라는 공통의 분모에서 시작했지만 음악이나 책 같은 공통의 기호를 반색하면서도 서로의 다름을 확인해가는 과정이다.
자기 통증에 이름을 붙이는 작명대회나 백일장을 열고 싶어진다는 이다울 저자의 말이 인상 깊다. 불편함과 아픔을 참고 숨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은근히 강요하는 사회에서 자라온 내게는 이 말이 발칙한 도전처럼 느껴진다. 나도 드러내지 못하고, 남이 드러내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마치 없는 것처럼 누르고 감추었을까? 내게도 외치지 못하는 고통을 누가 알아차릴 수 있을까? 이제는 누군가 옆에 있다면 그 사람의 고통도 함께 옆에 와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다. 이제는 세상에 없던 처음 듣는 증상이어도, 병명을 알 방도가 없어도, 심지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호소도, 말이 되지 못한 신음까지도 귀 기울여 듣기로 마음을 먹어본다. 다른 사람의 고통의 현장에 찾아가지만 정작 그 고통에 집중하여 공감하고 위로하기보다, 위로할 말을 찾고 실제로 말을 매끄럽게 해내는 데에 집중하는 나의 목사로서의 증상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책의 중반에 지금까지 편지 형식으로 나눈 둘의 대화가 어디로 가게 될지 염려하는 내용이 나온다. 어떤 내용을 다루어서 어떤 의미를 낳을 것인지, 출판해도 괜찮을지 걱정한다. 안희제 작가가 강의에서 들었다는 말이 떠오른다. ‘오래된 동굴벽화를 왜 그렸을까 질문하는 것은 그림에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종교나 유희나 예술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었을 수도 있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자신들의 필담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방향이 정해질 거라고, 겁도 나지만 기대도 된다고 작가는 말했다. 특별한 깨달음을 담은 말도 아니고 작가가 힘주어 강조하는 말도 아니지만 나는 이 말에 위로를 얻었다. 아직 의미를 낳지 못한, 책의 중간 즈음이라는 상황과 40대 중반이라는 내 나이가, 말을 주고받는 편지라는 형식과 쉬지 않고 내게 와 부딪는 세상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겠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려고 한다.
희망은 어떤 완료된 것 혹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자 동시에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희망은 갖거나 품는 것이 아닌, 부단히 실천함으로써만 지탱할 수 있는 어떤 존엄일지도 모르겠습니다.(205)
김국진 목사 (산돌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