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언자들
<예언자들>, 아브라함 J. 헤셸, 이현주 역, 삼인, 2004
예언서를 연구한다는 것은 주로 예언자들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빗대어 그들의 메시지를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만, 정작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예언자들을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만 연구하고 책으로만 만났으니 역사 한가운데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몸부림치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세상을 마구 흔들어 요동치게 만든 예언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로 하여금 역사 앞에 자신의 몸을 과감히 내던지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셸 랍비의 <예언자들>은 20세기 손에 꼽을 만한 걸작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예언자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헤셸은 “신의 파토스”(Divine Pathos)라는 개념으로 구약성서의 예언들을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파토스의 신이라는 것이고 예언자들은 신의 파토스를 몸으로 느끼고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자들은 단순히 신의 말을 전달하는 메신저나 또는 장래를 내다보는 선견자들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신의 연민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자들은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도덕 선생들도 아니고 이성을 잃은 광분자들도 아니다.
예언자들의 글은 신의 파토스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신의 파토스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자비와 사랑 때로는 실망과 분노와 같은 감정으로 표출된다. 예언자들이 열변을 토했던 것이 바로 신의 파토스다. 예언자들은 세상의 불의를 보고 호통을 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었다. 신의 파토스는 역사적, 사회 비평 같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예를들면, 예레미야는 신의 파토스를 이렇게 전달하고 있다: “주님의 진노가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끊고 있어서, 내가 더 이상 주님의 진노를 품고 있을 수 없다”(렘 6:11).
신의 파토스를 가장 잘 전달해주는 언어가 바로 시다. 구약성서의 예언의 독특한 점 하나가 바로 대부분의 예언이 시로 적혀 있다는 것이다. 헤셸은 예언자들은 시인이라고 했다. 시인이 시적 영감으로 여기는 것을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부른다. 예언자들은 시인과 마찬가지로 감수성, 정열, 상상력을 부여 받은 것이다. 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시에서는 나무들이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모스는 번영과 향락을 일삼으며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을 바산에서 풀을 뜯는 암소로 비아냥거리면서 “하나님의 분노”(신의 파토스)의 말씀을 시로 전했고(암 4:1-3), 이사야는 포로귀환의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주어진 포도주와 젖에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신의 파토스)의 말씀을 시로 전했다(사 55:1).
예언자들의 마음을 역사 현장에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신의 파토스였다. 헤셸은 마틴 루터 킹과 함께 셀마 몽고메리 행진을 주도했다. 예언자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신의 파토스에 이끌려 정의와 평화 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헤셸은 예언자들을 자세히 연구하게 되면 결국 예언자들과 사귀게 된다고 했다. 예언자들과 사귄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의 파토스에 이끌려 그것을 증언하는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한 가운데서 신의 파토스를 전하고자 몸부림치는 예언자는 오늘도 여전히 존재한다.
김진양 목사(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사, 세계교회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