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정지인역, 곰출판, 2021.
제목: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인의 강력한 추천으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상한 제목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니,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제목과 책의 표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것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혹은 학술서인지 도통 어떤 종류의 글인지조차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저 책 표지에 한가득 적혀있는 찬사 어린 평가들을 눈으로 대강 훑으며 호기롭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책과 함께 지낸 2박3일이 지나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의 솔직한 심경을 표현하자면 좀 길고 모호하다. 놀라움과 감탄, 분노와 충격 그리고 따뜻함과 성찰이라는 감정과 행동의 출렁임이 여운으로 깊이 남아 있다고 할까. 이처럼 다양한 감정과 깨달음이 책을 읽는 동안 마치 파도처럼 반복적으로 들이닥치며, 내가 발 딛고 서있는 모래바닥의 모래를 한 움큼씩 흩어놓고 있는 듯한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다.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경험해본 이들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파도로 인해 나를 지탱해주는 땅이 스르르 사라지고 이제 두 팔을 움직여 이 넓은 바다 위를 헤엄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 말이다. 마치 평온했던 내 일상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방식의 사유와 삶의 태도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얘기하는 작가의 소근거림 앞에서 복작거리던 내 생각의 모호함은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삶의 단호함으로 바뀐다.
그 만큼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력하다. 종종 어떤 영화는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예를 들면 대표적인 3D 영화 ‘아바타’가 그렇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독서’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읽는 동안뿐만이 아니라, 독서 이후 일상의 삶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과정을 말한다. 이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껍질 밖의 세상을 갈망했던 20대 때의 나를 떠오르게 할 정도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무슨 책이기에 이렇게나 후일담이 장황할까 궁금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의 특성상 향후 이 책을 접할 이들을 위해서 ‘스포일러 금지’가 필수적이라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될 수 있는 한 아무 정보도 접촉하지 않은 채로 책을 읽되, 끝까지 읽을 것을 추천한다. (검색창과 유튜브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의 이름을 검색하면 ‘스포일러 금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책에 대해 간단한 몇 가지를 언급하자면 과학전문기자인 룰루 밀러의 첫 번째 저작답게 이 책은 과학전문기자의 차갑고 예리하고 전문적인 시각을 정확하게 담고 있다. 하지만 과학과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는 신학과 철학적 사유 또한 풍성하게 그리고 있다. 또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각각의 사회적 상황과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너무나) 충분하게 다루고 있는데, 초반의 차갑고 건조한 느낌을 유지하면서도 따뜻하고 열정적인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작가의 필치가 특히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반전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내용뿐만 아니라, 책의 구성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다음의 두 문장은 모두 작가의 고백이다. 과연 2페이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작가의 생각이 바뀌었을까.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들이다.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193p)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195p)
이 같은 편집 방식을 ‘도치’라고 하는데 전혀 다른 내용을 앞과 뒤에 배치하여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의 전반에는 매우 수준 높은 지식과 스토리텔링이 가득하지만 그 내용을 배치하는 편집 방식 또한 매우 흥미진진하다.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독서의 계절인 이 가을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제목으로 삼은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230p) 역시 책 속에서 흐르는 수많은 문장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미덕은 눈으로 읽는 문장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읽는 문장으로 이끌어준다는 데에 있다.
이관택 / 라오스평화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