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게시판
바이블25
크리스천라이프
커뮤니티
갤러리
성경/찬송가
지역정보
로중
전도
뉴스
QT
전도모음
Cristian YouTube
     
커뮤니티
칼럼
명언묵상이미지
하늘양식
오늘의책
십자가
명상
영상
설교
말씀
독자편지
독자편지 [121]
 
 
 
     
 
 
 
작성일 : 22-09-08 12:12
   
영혼의 삶
 글쓴이 : dangdang
조회 : 8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121 [130]



영혼의 삶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열린책들, 10,800원(상), 12,800(하)

“내 영혼이 내 삶에 지쳤나이다. My soul is weary of my life(KJV) -욥기 10:1” 또한 앙리 프레드릭 아미엘은 말한다. “우리가 보는 풍경은 우리 영혼의 상태이다.” 우리가 보는 세상의 풍경은 너무나 지쳐 있다. 아미엘의 말처럼 그것이 우리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하면 욥의 한숨섞인 말을 나도 모르게 따라하게 된다. ‘내 영혼이 내 삶, 이 삶에 지쳤나이다.’ 

「불안의 책」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그의 책 첫 머리에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에 태어났다.”고 고백한다. 한술 더 떠 내 안의 ‘영혼’의 존재를 잃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분명 사람은 육체와 영혼과 정신을 가지고 한 생을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건만 교육에 의한 지성과 본능에 따른 육체는 잘 살아가는 한편 영혼은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지 의문이다. 일단 영혼이라는 단어, ‘영’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집중력을 잃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측정도 불가하며 감각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집요할 정도로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영혼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글을 써 준 몇몇 작가들이 있다. 영혼 그 자체로의 자전적 기록을 남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저서, 「영혼의 자서전」을 추천하는 이유다. 

  "내 영혼 전체는 외침이요, 내 모든 작품은 그 외침에 대한 설명이다."(「영혼의 자서전」, 작가노트)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한 때 교회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기도 했다. 「붓다」나 「최후의 유혹」 같은 저서들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실제 삶이 들어 있는 자전적 저서를 읽고 나면 그 모든 작품들이 ‘영혼의 오름’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몸과 두뇌와 영혼이라는 인간의 여러 다른 요소들이 뭉그러져 뒤엉키고, 끔찍한 피의 방황 이후에 인간성이 다시 신성한 원시의 단일성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모양이라고 느꼈다. 이런 상태에서는 <나>와 <너>와 <그>가 없고, 모두가 공동체이며,(같은 책, 137p) "
  "처음으로 나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같은 흙으로 빚어졌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인간은 늙거나 병들었거나 불운이 닥칠 때만 그런 요소들이 내면에서 서로 분열하고 맞서 싸운다. 때로는 육체가 지배하고 싶어 하며, 때로는 영혼이 반란의 깃발을 올리고 도망치려 한다.(239p)"

그는 터키의 그리스 대학살 시기를 겪은 어린 시절부터 고집스러운 기독교 신자였다. 성인들의 이야기에 심취하고 스스로 영혼을 위해 고행에 가까운 삶을 살기를 희망하는 학창시절을 거쳐 영혼의 문제와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지식과 지성을 탐구한다. 또한 아토스 산에서부터 시작해 수도원 순례와 세계 곳곳의 여행을 통해 영혼으로서의 여정을 이어간다. 

그의 여정은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히 ‘영혼 중심적’이다. 사람을 영혼과 육체를 따로 떼어 놓아 이야기 하기는 어렵지만 육체로서의 삶이나 정신으로서의 삶보다 영혼으로서의 삶이 훨씬 주가 되는 기록이라는 점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어찌나 고군분투하며 고뇌하는지 「천로역정」의 여정은 동화같이 여겨질 정도다. 

인간이란 얼마나 복합적인 존재이며 또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 한 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선천적, 환경적 유혹을 받으며 살아가는가. 그는 성서의 장면에서 인간적인 다른 요소들을 발견해 상상하기도 하고 그게 반발해 더욱 더 철저히 영혼중심적인 고뇌에 빠지기도 하며 세계 1,2차 대전과 사랑을 겪으며 인간의 피상적인 현실을 몸소 느끼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투쟁’이라고 일컫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투쟁’이기 때문이다. 

  "고뇌는 격렬했다. 나는 내 육체를 사랑해서 그것이 사멸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영혼을 사랑해서 그것이 썩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맞서 싸우고, 세계를 창조하는 두 힘을 화해시켜 그들은 적이 아니라 동지들이므로 조화에서 기쁨을 얻고 따라서 나도 그들과 함께 기쁨을 누리게 해달라고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중략) 육체와 정신의 투쟁, 반발과 저항, 타협과 순종, 그리고 결국은 투쟁의 숭고한 목적인 신과의 결합. 이것이 그리스도가 행했고 그의 피투성이 발자취를 따라 우리들이 행하기를 바라는 오름이다. (397-8p)"

그는 그리스도를 생각한다. 성육신이라는 숭고한 본을 따라 육체와 영혼의 격렬한 투쟁을 몸소 경험하고 시시때때로 갈등해 가면서 마침내 흙을 한 줌 쥐고 흙으로 돌아간다. 책의 첫 머리에서 시작된 크레타의 흙 한 줌과 할아버지, 자신의 조상을 향한 부름은 지음받은 그 때의 흙을 향한 그리움이며 또한 인류의 태초를 향한 울부짖는 고백이다.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책의 처음에 적힌 이 기도는 가장 마지막에 이렇게 끝을 낸다. “나보다 훨씬 위대하고 순수한 힘이 계속해서 겨누어 화살을 쏘았다고 느꼈으므로 나는 기뻐했다. 모든 나무는 십자가를 만들 수 있기에 모든 나무가 참된 십자가에서 온다. 마찬가지로, 모든 육체는 활이 될 수 있기에 모든 육체가 거룩하다. 내 생애 전체는 비정하고 만족으로 모르는 손에 들린 활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들이 얼마나 자주 그 활을 부러질 지경으로 당기고, 또 힘껏 당겼는가! ‘부러져라!’ 그때마다 나는 소리쳤다. (중략)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 싸움이 끝났으니 나는 당신 옆에 누워서 흙이 되어서,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최후의 심판을 기다릴 터이다.” 

영혼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작가는 분명 육체보다 비대한 영혼을 지녔을 것이다. 영혼이 육체나 정신보다 더 커서 끊임없이 내면에서 투쟁하며 <나>의 존재를 이루는 요소들을 낱낱이 인정까지의 상처 많은 길을 기어올랐던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영혼으로서의 삶에 충실한가. 육신의 낙이 넘치는 오늘날 우리의 육신과 정신만큼 영혼이 같은 속도로 성장하려면 얼마나 많은 투쟁과 고뇌가 필요할 것인가. 그보다 하나님의 생기로부터 온 영혼이 빚어내신 흙과 함께 어우러져 작가의 발견처럼 태곳적 공동체로 함께할 수 있도록 화해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또 하나의 흙의 조상이 되어 남겨준 기록을 읽으며 영혼의 삶으로 사는 시간이 조금 더 풍부해 지기를 바래본다. 

박창수 목사​

 


 
   
 

 
Copyright(c) 2012 http://bible25.bible25.com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