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의 언어들
<보통의 언어들>, 김이나, 위즈덤하우스, 2020
대학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그래도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교양 과목들 중에 하나 정도는 들어야하지 않겠어?’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여곡절을 통해 ‘감삶’이라고 줄여 불리던 ‘감정과 삶’이라는 과목을 들었는데, 별다른 생각 없이 신청했던 이 과목이 저에게는 꽤나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미국의 제작사 픽사에서 공개한 영화로, 아이의 다양한 감정을 기쁨이, 슬픔이, 소심이, 까칠이 등으로 분류하여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슬픔이’가 자취를 감추자 ‘기쁨이’ 역시 힘을 잃어 점차 시들시들해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 픽사에서는 심리학적인 다양한 연구를 참고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적극적으로 얻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그리고 제가 들었던 ‘감정과 삶’이라는 교양 수업에서도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던지는 메시지가 바로 ‘나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진부하고, 어느 정도의 삶이 누적된 분들에게는 당연한 문장이겠지만, 생각보다 우리는 이 문장을 행동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책 <보통의 언어들>은 언어라는 틀을 중심으로 감정과 얽힌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우리가 느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형태와 틀이 없는, 연기 같기도 하고 돌멩이 같기도 한 감정을 서로 교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그릇이 되어줍니다. 만약 언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행동으로 폭발시킬 수는 있었을지언정, 복잡미묘한 마음속의 날씨를 상세히 전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오히려 언어는 우리의 감정을 가두어버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KBS2 <대화의 희열>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작가 김영하 씨는 아이들로 하여금 ‘짜증난다’라는 단어를 금지시켰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짜증’이라는 표현은 당황감, 분노, 서운함, 답답함 등 다양한 감정을 그저 ‘짜증’이라는 하나의 주머니에 담아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언어는 우리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것을 그려내는 데에 있어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하고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감정의 현 주소를 정확하게 짚어내기 위해, 이를 세밀한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아이디어에 착안하여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되는 것이 아니라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도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저는 아직 누군가와 비교를 한다면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대학생으로서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과외나 학원 아르바이트, 그리고 교회와 같은 공동체 안에서 어린 친구들도 많이 만납니다. 그리고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연령의 어른들도 만나죠.
이 과정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내 속에 가만히 담아두는 것이 마치 미덕처럼 느껴지는 문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누군가에게 화가 나거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거나, 혹은 내가 이뤄낸 성과로 인해 너무나도 기쁠 때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하는 것이 옳은 줄로만 알고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은 이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제 일화를 조금 나누어 보자면, 대학생활을 하다 보니 갑작스레 알게 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교류하며 고민해야하는 문제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와는 더욱 가까워지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지만, 누군가와의 관계는 상처가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흉터를 지울 수는 없게 되기도 했습니다.
언제고 짧은 기간 안에 갑자기 제 주변을 여러 사람들이 떠나갔을 때가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다보니 자연스레 소원해졌고, 누군가는 저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며 등을 돌렸습니다. 또 누군가는 저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서로 분노의 말을 주고받으며 상처를 입힌 채 사라졌습니다.
그러고 나니 당시의 저는 여전히 나는 괜찮다며 슬픔을 부인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괴로운 마음을 꼭 쥐고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았더니 당시 제 마음이 조금씩 시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으로 그 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음원 스트리밍 앱을 설치해서 생애 첫 음악 감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적당한 진동이 발끝부터 기분 좋은 불규칙함으로 전해지는 버스라는 공간 안에서 나와 상황이 똑같지도 않은 적당히 슬픈 내용의 가사에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섞여드는 것만 같았어요. 그 순간이 저에게는 꽤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조금은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소재로 한 여러 책들을 찾아 읽으면서 내가 직접 내뱉기 어려운 이 엉킨 실타래 같은 감정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언어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저는 제 감정을 언어로 읽고, 듣고, 그리고 표현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나의 감정은 사실 오롯이 나만이 들어주고 또 표현해나갈 수 있어요. 아무리 나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려고 든다고 해도 내가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과 같은 양으로 공감해줄 수는 없습니다. 책에도 이런 구절이 나와요.
“모두에게, 모든 곳에서 온전한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주 이기적이어야 가능하다. 배려하기에, 사랑하기에, 책임이 있기에, 히스토리가 있기에 우리는 종종 다른 모습을 한다.”(p. 158, eBook 기준)
이 책의 문장처럼 우리는 내 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진 나의 마음에 맞춰 각기 조금씩은 다른 모습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온전히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에 다른 사람들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가끔씩 찾아오는, 나의 일상의 잔잔한 감정의 파동보다 조금은 더 강력한 파도가 친다면 그를 꼭 언어로 표현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추천합니다.
그것이 기쁨일 수도 있고, 행복일 수도 있고, 때로는 투정 섞인 분노이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비통함일 수도 있지만, 내가 표현해낸, 혹 내가 직접 표현하기는 너무 어려워 비슷한 글을 찾아 읽어서라도 나에게 온 이 언어가 내 감정에 진정한 축하와 심심한 위로가 되어 줄 거예요.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할 수 있었던 문장 몇 가지를 공유하며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1) ‘좋아한다’는 감정은 반대로 조건이 없다. 혼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마음 한편이 시큰해지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게 없다. 해가 좋은 날 널려진 빨래가 된 것처럼 뽀송뽀송 유쾌한 기분만 줄 수 있는 건 ‘좋아하는 사람’이다. (p. 9)
2) 나는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말은 완벽히 상대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나 하나만 놓고 보자면, 나는 완벽하다. 잘난 부분 딱 그만큼의 못난 부분을 갖춘, 완벽한 밸런스를 갖춘 사람이다. (p. 11)
3) “우리는 서로를 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p. 15)
4) 실망이라 함은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상한 마음’을 뜻한다. 역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상한 마음’이 아니라 ‘바라던 일’이다. 실망은 결국 상대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무언가를 바란, 기대를 한, 또는 속단하고 추측한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p. 16)
5) 기침이 나고 콧물이 흐르는 것은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와 싸운 내 몸이 이를 게워 내는 현상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깨끗이 배출해내는 것이 매너가 아닌 필수적인 행동 요건인 이유다.
우리 몸에서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이와 같다. 나가야 할 것이 나올 때, 콧물이든 눈물이든 무엇이든 흐르는 거다. (p. 99)
6) 외로움은 반드시 채워져야 하는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오롯이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감정이다. (p. 111)
7) 외로움은 무대 위도 객석도 아닌, 무대 뒤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p. 112)
8) 나를 살아남게 해준 순간들이 있다. 좋은 가사를 써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고뇌하는 순간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가사가 잘 나오지 않을 때, 슬럼프가 찾아올 때, 밀려 나가지 않으려 버틸 때 등의 초라한 시간들이 내가 살아남을지 아닐지를 결정해주었다. (p. 174)
9) 기억하자. 오래 살아남는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 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는 없단 걸. (p. 177)
김은기 (대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