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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23]
 
 
 
     
 
 
 
작성일 : 22-09-01 00:49
   
굿바이! 고르비
 글쓴이 : dangdang
조회 : 5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075 [136]



굿바이! 고르비

 

<선택>, 미하일 고르바초프 지음, 이기동 옮김, 프리뷰, 2013

 

엊그제 8월 30일 고르바초프(고르비) 전 소련대통령이 마침내 세상을 떴다. ‘마침내’라고 쓴 이유는 그는 세상에 있었지만, 마치 세상에 없는 존재처럼 살았다. 적어도 러시아 내에서는 그랬을 것이다. 그의 넓은 이마 위 검은 물결점은 한때 세계지도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고르바초르의 부고를 알리는 신문기사에는 “소련을 살리려다 냉전을 해체한 서기장”이란 부제가 달렸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으나 고르바초프는 소련도 해체하였다. 그렇게 거대한 강대국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몰락했을까, 궁금하였다. 현재의 세계지도는 1990년 고르바초프가 만들어낸 변화 때문에 가능하다. 하긴, 최근의 역사까지 살펴보면 1990년대는 아직 완료형이 아니다. 이미 해체되었다고 여겼던 냉전체제가 다시 부활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어느새 반년을 넘긴 우크라이나 전쟁이 증거이다. 옛 소련 연방 내 공화국 간의 잇달은 전쟁은 다시 위협적인 세계를 들먹인다. 30년 전, 우크라이나 핵무기 반출과 함께 폐기된 줄 알았던 핵전쟁 가능성도 자주 오르내린다. 예측할 수 없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신경증에 따라 덜 민주화된 러시아는 예측불가능한 나라로 취급받는다. 갑작스레 서유럽에 천연가스 공급을 아예 끊어버린 최근 뉴스만 보더라도 그렇다.

 

30년 전 붕괴 직전 소련이 그랬다. 고르바초프와 부시가 프랑스 파리의 소련대사관 만찬 중 나눈 대화인데, 고르비의 농담이 지극히 풍자적이다. <노태우 회고록>(조선뉴스프레스, 2011)에 나오는 대목이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100명의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이 AIDS 환자이나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부시 대통령은 100명의 경호원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테러리스트이나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100명의 경제보좌관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유능하나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런 소련의 운명에 대해 푸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소련의 붕괴를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며, 소련이 예전 모습 그대로 재창조되기를 바란다면 두뇌가 없는 사람이다.” 

 

소련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가 남긴 <선택>은 최후의 자서전이라고 불린다. 그가 영웅의 서사를 남길 입장은 아니지만, 세기말적 풍자와 같은 자서전을 쓴 동기는 라이사와 사랑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싶었던 때문이다. 부인 라이사 여사는 1999년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선택>에서 발견한 것은 이미 역사가 된 격변시대나, 변화를 밀고 당긴 크레믈린의 내밀한 사정이 아니었다. 특권층의 암투를 기대했는데, 오히려 개인의 고뇌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거대제국, 소비에트의 소용돌이 중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존재하였다. 집단농장의 농부를 부모로 둔 고르바초프는 마치 변두리 지방이 발탁한 농촌장학생처럼 모스크바대학교에 입성하였고, 농촌 정책을 발판으로 삼아 가장 작은 단위의 지도자에서 당 정치국원 농업담당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였다. 여기에는 자기 고향과 농업에 대한 애정, 당과 국가에 대한 충성 그리고 인간적인 성실함이 작용하였으며, 결정적으로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원로들의 집단 퇴진 후 찾아온 행운이 한 몫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소련 치하에서도 고르바초프의 부모를 비롯한 시골 사람들은 여전히 러시아정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믿었다. 아기들은 세례를 받았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교회에 촛불을 바쳤으며, 명절 때는 교회에 모였다. 아무리 소련공산당의 권력장악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조상부터 대대로 물려온 하나님 신앙마저 감시할 수는 없었다.  

 

1985년 3월에 당서기장으로 선출된 고르바초프의 성장과정을 당시 소련의 권력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여 어떻게 후계를 양성하고, 체제의 리더들을 배출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으레 권력투쟁만으로 읽다 보면 중요한 교훈을 놓칠 수있다.   

 

고르바초프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까지 개혁개방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였고, 이는 소련 연방 내 공화국들과 중동부 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대변혁을 불러왔다. 그가 추진한 개혁정책은 체제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문제들을 급속히 분출시켰는데, 허약한 소련 체제는 스스로 수술한 능력이 없어 붕괴되었다.

 

이를 빗대어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해체의 결정적 순간들>을 쓴 마이클 돕스는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체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려다가 오히려 무너트리는 데 성공한’ 참으로 보기 힘든 아이러니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반세기 동안 세계를 괴롭혀온 냉전체제를 무너트린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냉전을 평화적으로 끝내고 동서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 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 세력의 구체제로의 복원을 꾀하는 쿠데타 이후, 오히려 급진 개혁파 옐친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내주었고, 1991년 말 연방 해체와 함께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고르바초프의 <선택>은 비교적 자신의 성장 과정과 민중의 일상적 경험을 소상히 기록한다. 특히 가족이야기의 속사정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과 남다를 것 없이 공통적이다. 이념이야 어떻든 간에 사람들의 운명 역시 그런 따듯한 가족 관계 속에서 시작하고, 마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산당 최고 간부의 일원이 된 고르바초프가 자기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가 홀어머니를 모스크바로 모셔온 것은 평생 농부로 살던 모친이 병약해진 다음이었다. 크레믈린 병원에 입원시켜 드린 후 고르바초프 부부는 교대로 병문안을 하였다. 어느 날 저녁 늦게까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는데, 그 밤에 갑자기 운명하였다. 마지막 순간, 의사가 아들에게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태평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애가 다 알아요.”

 

소련공산당 최고권력자의 자서전에서 거대담론이 아닌 기대밖에 세밀한 인간의 이야기를 읽었다. 마치 외부의 충격이 대단한 격랑을 만들어 가는 듯하지만, 그 날개 짓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이 책에서 70여 년을 견고하게 군림한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蘇聯)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몰락했을지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그때와 같은 목표, 다시 말해,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사회주의를 위해 싸울 것이다.” 어쩌면 “고르바초프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어도 벌어지도록 ‘허용’한 일이었다”(돕스).

 

송병구 목사 (색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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