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교회 생활이 되기
<믿음의 역동성>, 폴 틸리히, 그루터기하우스, 2005
행복한 교회 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에는 활기찬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처음 교회 출석을 하고 활동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뜨거운 믿음을 다시금 불태워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신앙에 뜨거운 불을 지피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그 이유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 사회의 급작스러운 변화와, 탈종교를 넘어서 무종교화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과 현실에서 살아가는 가치관이 때로는 충돌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시험을 받기 마련이다. 그야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는 믿음이 세상과는 맞지 않는다면 자신을 속이거나 또는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폴 틸리히의 책은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준다. 그것은 믿음의 역동성이다. 믿음에는 힘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움직이거나 개인의 마음에 영향력을 줄 수 있다. 그런 어떠한 방식으로든 움직임이 있는 믿음이 바로 역동성이 있는 믿음이다.
틸리히는 분명 믿음에 힘이 없는, 즉 역동성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통찰력과 연관이 있다. 믿음에는 분명 실존에 대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서있음과 동시에 그로부터 앞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는 통찰력이 있다. 그런 통찰력이 사라지거나 없을 경우에 믿음은 쉽게 맹목적인 것으로 변하기 쉽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단순히 문자 그대로나 또는 아무런 이성적 사유를 배제할 수 없다. 다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은 맹목적인 믿음이 이성을 뛰어넘는 믿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안셀무스의 조언처럼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그 말은 결국 이성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역동성에는 이성적 역동성이 포함된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결코 설명되어질 수 없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학자들과 신학적 개념들이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맹목적인 믿음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큰 차이점은 이성적 역동성이 유무차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틸리히는 상관관계의 신학자로 불린다. 이성과 믿음은 서로 상호적이고 보완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에도 이러한 상호 보완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저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는 지를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믿음의 확신을 위한 믿음에 대한 의심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교회 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습이 필요하다. 피상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과 그리고 그 실존이 하나님 앞에서 서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것은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 가능하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건 언제나 시간 속에 놓인 자신 존재에 대한 통찰이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런 자신을 용납해주신 존재자체의 은혜를 믿어야 한다.
이경우(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