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여름 밤의 상상,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 숀 탠, 사계절 출판사, 값 12000원
덥고 습한 한여름에는 진득하니 앉아 긴 글을 읽기 어렵다. 아무리 낭만적인 시나 고상한 글이라도 오래 붙들고 있기 어렵다. 현실을 회피하고 싶어지도록 늘어지는 여름에는 역시 가만히 누워 이국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벼운 이야기가 적격이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희곡처럼 한여름의 열기에 기화하는 꿈결 같은 상상과 그 곳에서부터 온 묵직한 교훈들이 담긴 동화 단편 모음집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을 추천한다.
저자인 숀 텐은 세계적인 동화 분야 상을 여럿 받은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어느 나라 독자에게도 똑같이 이국적인, 공상과학적인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의 유명한 저서 「도착」이나 「이름 없는 것」도 반드시 읽어보길 바라는 수작이지만 오늘은 짧은 단편들을 모아놓은 이야기책,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을 먼저 권해본다.
짧게는 한 장, 길어도 열장을 넘지 않는 단편 15편이 수록된 이야기는 상징적이면서도 내용과 잘 어울리는 삽화 기법과 함께 실려 있다. 이 내용을 아이들이 정말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사유나 깊이가 느껴지는 이야기들도 많다.
<나만의 애완동물 만들기>는 신문지 ‘지역 생활 정보 알림판’의 한 코너처럼 만화와 삽화의 중간정도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콜라쥬로 꾸민 한 장짜리 이 동화는 “외로우신가요? 친구가 필요하신가요? 라는 흔한 홍보문구로 시작된다. 필요한 재료는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주운 상자다. 거기에 여러 버려진 생활 폐기물들을 넣고 공기구멍을 뚫어 봉한 뒤 상자 옆면에 나만의 애완동물을 그려 넣는다. 뒷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오래된 생일 카드와 타고 남은 생일 초들을 넣어준다. 한 번 쓴 선물 포장지도 거름으로 좋다. 그리고 상자를 심는다. 비밀 한 두가지를 속삭여 주고 따뜻한 허브차를 뿌리고 잠자리에 누워 애완동물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잠들기 전까지 떠올린다. 그러면 다음날 아침, 나만의 애완동물이 상자에서 탄생된다.
"정성만 충분하다면 사랑받지 못했던 물건들이라도 완벽한 동물 친구로 변할 수 있답니다."(83p)
아이와 고양이로 보이는 동물이 껴안고 있는 마지막 삽화 밑에 써진 문구다. 외로운 아이와 버려지는 물건들에 대한 생각, 생일 카드와 생일 초들로 상징되는 탄생에 대한 잊힌 경의, 선물을 위해 예쁘게 포장되었지만 한 번 밖에 쓰이지 못한 포장지에 대한 의미심장한 은유가 빼곡한 짧은 이야기다. 나만의 비밀을 속삭여 준다는 대목에는 유대의 설화가 떠오른다. 뱃속에 잉태되었을 때 천사가 세상에 대해 다 알려준 후에 탄생 직전 비밀로 간직하라며 쉿! 이라고 입술에 손 댄 자국이 인중이라는 유대 설화처럼 비밀을 속삭여주는 행위는 고해성사 같은 성스런 행위와도 비견될 만큼 대단한 설정이다.
언젠가 한번 유년부 아이들에게 이 동화를 보여주고 동화내용대로 나만의 애완동물 만들기 특별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이 것이 실제가 아닌 걸 알면서도 정성껏 신중하고 박스를 만들고 비밀을 속삭이고 잠들기 전에 상상을 하면서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그리고 몇 몇 아이들은 이 얼토당토 않는 활동을 통해 마음이 후련해지고 따뜻해 졌다는 후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어른들도 독자대상인 책이긴 하지만 역시 아이가 주인공이거나 대상인 이야기들이 여럿이다. 그 중 <역류>라는 이야기는 아이도 부모도 모두 먹먹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매일 소리치고 싸우는 부부와 그들의 아이가 사는 17번지 집 마당 잔디에 갑자기 듀공이 등장한다. 가만히 누워 있는 듀공을 발견한 마을 주민들은 긴급구조대에 연락하고 듀공을 살려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듀공이 무사히 구조대에 의해 실려 간 후, 마을 주민들은 신문이나 뉴스에 혹시 이 소식이 들리지 않을까 기대하며 살펴보지만 아무 소식이 없자 곧 별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무심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17번지 마당 잔디는 듀공이 누워 있던 자리만 풀이 누렇게 변해 죽어 듀공이 잠깐이 아니라 평생 누워 있던 자리처럼 자국이 남는다. 부부는 잔디를 어떻게 되돌릴 것인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며 싸운다. 그 날 밤, 아이는 해양 동물학 책을 쥐고 듀공 모양이 나 있는 자리에 양 팔을 몸에 붙이고 누워 구름과 별을 바라본다. 부모들이 자기가 방을 빠져나온 것을 늦게 알아채기를 바라면서.
“그러므로 그 부모들이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나타난 것은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가 느낀 것이 자신을 들어 올려 침대로 데려가는 부드러운 손길뿐이었던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38p)
듀공이 왜 갑자기 등장했는지, 17번지 부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몰라도 된다. 그러나 뜻도 모르면서 한 장짜리 이 이야기의 끝에서 조용히 부모님의 손에 안겨 듀공의 자리에서 집으로 옮겨지는 장면을 볼 때 가슴이 먹먹해진다. 포유류인 듀공이 잔디밭에 꼼짝도 못한 채 가만히 누워 구조되기만을 기다렸던 것과 아이를 동일하게 볼 수도 있다. 그의 구조현장에 온 마을이 왁자지껄 소란을 피웠지만 뉴스에 보도 한번 되지 않는 흔한 일로 결론내린 것처럼 부부싸움의 현장에서 조용히 흘러나와 가만히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 아이의 이야기도 흔한 일일 수 있다. 숱한 현장을 그러나 고발하기 보다는 어쩐 일인지 아이를 부드럽게 들어앉아 데려가는 장면을 상상할 때 느껴지는 애정과 감동은 숀 텐의 동화 전반에 흐르는 정서이기도 하다.
자세히 소개한 두 이야기 외에도 13편의 좋은 이야기가 수려한 삽화가 함께 실려 있다. 거리를 유령처럼 떠도는 나뭇가지인간이나 질문에 늘 대답을 해 주던 마을의 물소, 신기한 교환학생 에릭같은 상징적 캐릭터 이야기도 있고 이게 그냥 그림인지 동화인지 자세히 봐야하는 꼴라쥬나 신문지 형식, 점점 흐릿해지는 글자로 의도적으로 쓴 기발한 동화들도 있다.
어떤 이야기든지 모두 시원한 바람 밑에 배 깔고 누워 편하게 두 어장 들여다보다 그대로 눈을 감고 상상과 공상과 생각과 사유로 들어가게 만드는, 먼 곳에서 온 이야기인만큼 먼 곳으로 생각을 이끄는 이야기들이다.
이야기는 정보와 다르다. 그래서 ‘아하, 그렇구나’, 라는 수긍을 이끌어내기 보다는 ‘왜 그랬을까’, 하는 감정의 여운과 ‘그건 왜 그렇지?’, 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질문과 여운을 일으키기에 생각보다 많은 페이지가 소요되지는 않는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유년시절의 여름 풍경은 방학을 맞아 시골을 방문한 아이들의 까맣게 탄 얼굴이다. 밤이 되면 썰어주는 수박과 얼음을 넣은 보리차를 마시다 선풍기와 부채질의 비호를 한껏 받으며 가물 가물하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화나 동화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의 기억이 있다면 이번 여름에는 이 동화책을 함께 읽으며 재현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런 기억이 없더라도 여름날의 먼 곳에서 휴가 온 이야기를 읽으며 긴 여행같은 상상을 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박창수 목사(선한목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