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절된 꿈
<희망 대신 욕망>, 김원영, 푸른숲, 2019
“장애를 부끄러워하기보다 내 일부로 받아들이고, 장애를 가진 내 몸으로 움츠리지 않고 당당하게,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 여전히 나는 장애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수용하기 위해 애쓰고, 다리를 세상에 보여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정쩡한 시도를 계속하며, 내가 하는 말과 쓰는 글, 각종 도전과 역할이 “괜히 나서서 더 추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한다.”(6)
2019년 EBS 다큐프라임 3부작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 방영된 바 있다. 그 영상을 통해 김원영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골형성부전증, 뼈가 쉽게 골절되는 몸을 지닌 그는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고, 15세까지 병원과 집에서만 지냈다. 외부와 접촉할 일이 적으니, 홀로 자기 몸을 미워하기도 하며 또 긍정하기도 하며 보냈을 것이다. 그 지난한 시간들이 지금의 김원영을 빚어내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예술가로서 거리낌 없이 무대 위에 오른 그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긍정적인 자아정체성을 형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애와 세계를 화해시키는 일에 사명감을 품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는 견고했다.
<희망 대신 욕망>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진 장애와 화해해나가는 여정을 그렸다. 자기와의 화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진절머리 날 정도로 나를 놓아주지 않는 장애,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 내려다보게 만드는 장애, 사회적 배척당한 경험 때문에 얼마나 고된 시간을 보냈을까. 주디스 휴먼의 자서전 <나는, 휴먼> 한 꼭지에는 교육받을 권리를 쟁취하고자 분투하는 이야기가 그려져 있었는데, 주디스 휴먼의 20세기와 김원영의 21세기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특히, 김원영의 입체적인 고백이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도전을 어떤 친구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재활원을 극복해야 할 세계로 보는 우리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그 세계가 전부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려 했기 때문이다.”(113)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사건들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스스로 껍질을 깨고 바깥으로 나가는데, ‘해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여정처럼 느껴졌다. 기독교적인 표현을 동원한다면 이집트를 탈출하는 서사와 비견할만하다. 그 탈출은 혼자서 쟁취해낸 것이 아니었다. 기꺼이 안내해주고 이끌어준 선구자들, 해방의 순간을 함께 나눈 동료와 그들과의 연대 덕분에 가능했다.
욕망은 왜 평등해야 하는가. 책의 부제다. 평등한 권리, 평등한 자유는 귀에 익지만, 평등한 욕망이란 표현은 낯설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권리만큼 중요한 것이, 욕망이라는 저자의 진단이 생경했다. 주제 파악 좀 하라고, 하대를 당해본 경험이 있다면, 그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세속적 욕망을 품고, 다 해본 후에 그것이 덧없었음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져야 할 기회라는 저자의 역설이 참 좋았다. 성적 몸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 꼭지도 인상적이었다. 야한 장애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 그것이다. 저자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고복수(양동근 분)의 대사를 인용한다.
“나는 경이(이나영 분) 씨한테 죽을 때까지 남자였으면 좋겠어요. 아주 야한 남자였으면 좋겠어요. 경이 씬, 내 구역질나는 영혼까지 좋아해 주지만, 근데, 난 오히려 경이 씨가 내 몸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죽을 때까지.”(249에서 재인용)
욕망 없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마는, 어떤 사회는 특정 계층의 사람들의 욕망을 거세하곤 한다. 인권유린이다. 장애인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네 주제에 무슨”이라며 곱지 않은 사회적 시선에도 욕망이 제한되는데, 손상당한 몸이라는 내부적 요인으로 인해서 제약이 더 커진다. 장애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제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희망 대신 욕망>은 장애인의 욕망할 권리를 예찬하지만, 동시에 장애인이 겪는 욕망의 아포리아에 탄식한다.
“현재 시점에서도 결코 사회적 불운의 영역으로 이동하지 못할 것 같은, 즉 영영 ‘하늘이 준 불운’으로만 여겨질 듯한 몸의 상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중증의 질병을 가진 몸, 손상의 정도가 너무 심해 사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결국 죽음을 대비해야 하거나 그저 생존 자체에만 의미를 두어야 하는 몸이다. 또 사회적 노력을 아무리 해도 도저히 어찌하지 못하는 욕망과 고통을 품은 몸도 이에 해당한다. 걷지 못하는 나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는 있겠지만, 뛰고 싶은 내 욕망까지 실현할 수는 없다.”(256)
김민호 목사 (지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