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과 자유를 생각하다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한국인의 오래된 믿음이 있습니다. “TV는 바보 상자다.” 아이들이 TV앞에서 시간 죽이는 꼴을 보기 싫었던 부모들의 열망이 반영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영향을 매우 강력합니다. ‘나는 TV를 보지 않는다’거나 ‘우리 집은 TV가 없다’는 말이 자신의 지성을 강조하는 수사로 사용됩니다.
“고전”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WASP(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도) 시각에 매몰돼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고전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고전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이유는 재미가 아니라 의미 때문입니다. 고전은 당시의 시대정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대정신을 깊이 탐구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 하나를 훔친 장발장의 도둑질과 여성 노동자의 노동과 성을 착취하고 임금을 떼어먹기 위해 해고하는 자본가의 도둑질 중 무엇이 더 중(重)한가?’ 고전은 독자를 중요한 질문 앞에 세우고, 독자는 그 질문을 통해 지성인으로 성장합니다. 이런 질문에 불성실한 것이 반지성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TV 드라마 중에는 고전 못지 않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재미와 의미를 모두 잡은 작품들 말입니다. 최근에 종영한 <우리들의 블루스>도 그런 작품 중 하나입니다. 거짓말과 오해로 갈등이 발생하고, 우정과 사랑으로 해소되는 여러 에피소드가 펼쳐집니다. 우리 사회에 미진한 혐오와 인권, 인간성의 문제도 섬세하게 다룹니다. 에피소드마다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고, 우리가 이룩할 인간성과 공동체에 대한 지향이 구체화됩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사실, 할 말과 안 할 말을 분별하고, 거짓에 속지 않고,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이해가 안 되면 오해가 아니라 질문을 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상식을 지키지 못해 많은 위기를 초래합니다. 그 틈에, 속이려고 하는 자들은 속을 준비가 된 이들을 기가 막히게 알아봅니다.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고 속는 말 중에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반대로 자유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인 것 같은데, 이 단어의 정체가 전반적으로 모호합니다. 이 대목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를 발명한 사람”입니다. 자유는 원래부터 있던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밀이 <자유론>을 발표하기 전까지 민주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유는 “본성으로서의 자유”뿐이었습니다. 이 자유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됩니다. 이것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논쟁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적인 자유였습니다.
그러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진행되는 와중에 존 스튜어트 밀이 “시민의 자유”라는 개념을 들고 나옵니다.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논쟁하는 자유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이 누릴 자유를 확립하는 일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밀은 자유의 역사를 ‘타인을 억압하는 힘있는 자들의 자유로부터 억압받지 않을 힘없는 사람들(시민)의 자유를 쟁취해가는 역사’라고 정리합니다. 그리고 이 자유를 성취해가기 위한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입니다.
밀이 발명한 시민의 자유,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시민의 자유는 정치권력, 경제권력, 사법권력, 언론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권력을 제한하고 감시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힘없는 사람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 힘 있는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자유입니다. 결국, 기득권과 권력이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고 철저히
감시받겠다는 뜻일 때만 진실입니다. 이 개념을 벗어난 자유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본디 민주주의는 시민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제도이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처럼 자유를 거듭 강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이런 질문만 남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토록 자유를 강조하는 만큼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가?
우동혁 목사 (만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