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과 몸의 경험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사람들
<거부당한 몸>, 수전 웬델, 그린비, 2013
“그 자체로 견고하고 완전했다.” 다큐멘터리영화 <반짝이는 박수소리> 말미에 나오는 해설이다. 청각장애인,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체에 장애가 있다고,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장애가 있어도 그 자체로 견고하고 완전한 존재이다. 이 명제가 퍽 인상적이었다.
그린비 출판사 ‘장애학’ 두 번째 도서는 <거부당한 몸>이다.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우리 사회가 거부하는 ‘몸’이 있다. 횡단보도 보행시간, 엘리베이터 탑승인원 등등 대다수의 기준이 성인 남성에 맞춰져 있다. 건설현장에서 사고를 당하는 비율이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은데, 성인 남자를 표준으로 안전규범이 만들어진 까닭이다. 그렇다. 우리사회에는 “강하고 건강하며 평균적인 젊은 비장애남성”(86)만을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크다. 그 외에 병에 걸렸다거나, 여성이라거나, 신체에 장애가 있을 경우,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찍는다. 불평등한 대우도 자연스런 귀결이다. <거부당한 몸>은 이토록 오염된 생각들을 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책으로, 특히, ‘장애’에 초점을 맞춘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어떻게 공생할 수 있을까. <거부당한 몸>에 의하면, “장애에 대한 공포를 낳는 낙인과 편견, 무지 등”(112)을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애를 지닌 삶은 가치가 없다”는 난폭한 우생학적 사고에 잠식당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장애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어쩌면 그 연장선 상에 있지 않을까. 동정과 시혜, 봉사, 타인의 고통을 위안거리나 감상거리로 삼는 것, 인권감수성이 부족한 인간들이 취해온 선택지는 그런 것들이었다.
보호와 돌봄이라는 명목으로 장애인시설에 수용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중증 장애의 경우, 철저히 통제된 도움이 필요하겠으나, 원칙적으로 ‘격리’라는 방식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장애를 “개인적 불운/악운”, “생물학적 불행” 등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로 간주하고, “사적인 영역으로 추방”해온 온 일에 대한 성찰이 시급하다. 그렇게 개인사로 문제를 축소시켰기에 ‘극복 서사’와 ‘장애인 영웅’이 탄생했다. 헬렌 켈러, 스티브 호킹 등등. 장애인으로서 큰 업적을 남겨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이들 혹은 동기부여 강사로 활동하는 이들이 장애를 ‘극복’했다고 찬사를 받는 ‘장애인 영웅’에 해당될 텐데, 이에 대해 저자는 주의할 것을 당부한다.
“장애인 영웅이 장애인에게 힘을 주고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이들은 비장애인에게 장애는 누구나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준다. 장애인영웅은 주로 대부분의 장애인이 가지지 못한 사회적/경제적/신체적 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130)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말라>의 저자 해럴린 루소는 ‘장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장애가 있어도’ 얼마든지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음을 역설한 바 있고,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의 육상효 감독은 장애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장애를 가지고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에 주목하고자 했다고 하더라. 장애는 극복의 대상도 아니고, 치유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비단 장애인뿐만 아니라 많은 소수자들이 종교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치료받아야 한다며 양육자들에게 끌려 다니며 수모를 겪는 일화가 참 많은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장애의 생물학적 원인을 없앤다는 약속은 곧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장애에 대한 문화중립적이고 생의학적인 정의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며, 이는 장애가 신체적/정신적 차이로부터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흐려 버린다.”(165)
노들장애인야학 사무실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우리의 해방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저자가 책 말미에 ‘초월’을 언급하는데, 그게 전혀 엉뚱하지 않다.
김민호 목사 (지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