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누며 살아간다는 것에 관해
<자기 앞의 생>, 로맹가리 저, 문학동네
책장을 둘러보다가 느닷없이 <자기앞의 생>이란 소설을 다시 집어들었다. 아마 10년도 전에 읽었던 책일 거다. 내가 사랑하는 소설 중 하나이다. 등장인물 모모는 무척 이뻤다. 비록 모모가 사는 동네는 외형적으로 이쁘지 않았지만.
프랑스 빈민가 비송거리 마을, 창녀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마담 로자의 집에는 실제로 14살이지만 10살인줄 알고 있는 주인공 모모가 살고 있다. 로자는 평생 창녀로 살아왔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온 유태인으로, 지금은 너무 뚱뚱해져서 몸을 잘 가눌 수 없는데, 언제나 짙은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린다. 그녀는 창녀들이 자기에게 맡기고 간 아이를 기르라고 보내 준 엄마들의 양육비로 아이들을 기르며 생활하고 있지만, 때로 엄마들은 연락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맡은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거나 하지 않고 투덜대며 키워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7층에 사는 마담 로자와 모모. 로자는 이제 너무 뚱뚱해지고 몸이 아파서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고 잘 움직일 수 없다. 그러자 열살 모모가 로자를 돌보기 시작한다. 그 거리의 모든 이들이 가난하지만 로자와 모모를 알고 있는 이들은 기꺼이 그들을 돕는다.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사람이 사랑이 없이 살 수 있는지를 묻곤 한다. 의사 카츠는 자신의 진료실에 밤늦게 찾아오는 사람들도 친절하게 치료해준다. 그리고 마담 로자가 움직여서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을때에는 직접 그녀의 집에 가서 그녀를 진료하기도 했다. 여장 남자인 권투 선수 출신 세네갈인 롤라는 7층까지 와서 로자를 깨끗이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혀주곤 한다. 아프리카 사람 왈룸바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로자 앞에서 묘기를 부리고 악령을 몰아내는 춤을 추면서 로자를 즐겁게 해주려고도 한다.
어느 날 로자는 결국 죽고, 모모는 썩어가는 로자의 시신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아주 진한 향수를 뿌린채 그녀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3주간이나 그녀의 옆을 지킨다. 모모를 포함해 비송거리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아도 나누는 마음과 나누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떤 보답을 기대하고 다른 사람을 돕지 않았다. 그들의 고단한 삶을 서로 도우며 헤쳐 나가는 그 자체에서 기쁨을 누리는 이들이었다. 물질적으로 가진 게 없어도 나누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인지, 너무 일찍 철들고 조숙해져 버렸고 시니컬함을 가진 모모지만 그래서 애늙은이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모모는 신경질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다. 아마도 정상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비송거리의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일거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댈 때 우리는 쉽게 지치거나 분노한다. 벗어날 수 없을 거 같은 절망적 구조 안에서 누구를 향해 화를 내야 할지 모를때 우리는 나를 향해서거나 사회의 구조를 향해서 어떤 점에서는 의미없는 날선 분노를 쏟아낸다. 대부분의 경우 그건 희망으로 되돌아오는 것 같지 않다. 사람이 사랑이 없이 살 수 있냐고 묻는 모모는 스스로 어떤 답을 내렸을까?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사랑과 희망을 걷어냈을 때 절망은 냉큼 우리를 잡아가버린다.
사랑은 꼭 필요하고, 그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나눔이다. 비송거리 사람들이 그랬던것처럼 더 곤경에 처한 이들을 위한 마음과 정성을 한 줌 내어보는 일, 그것은 따뜻함이고 사랑이다. 그 사랑 속에서 희망은 다시 피어난다. 세상이 우울하고 불안하다고 말하는 많은 이들에게..나누고 싶은 말 한마디는 "당신의 사랑을 나누어보지 않을래요?" 물론 정당하게 받지 못해서 아프지만, 받지 못했다고 해서 나누지 못하는 건 아니다. 좀 버벅대고 어렵긴 하겠지만 받지 못했어도 나눌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상담의 끝은 따뜻한 사랑과 마음을 기꺼이 이웃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나누는 사람으로, 거기에서 작은 기쁨과 희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앞의 생>을 나는 참 좋아하는 거 같다.
권미주 목사 (희망나무 심리상담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