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곱게 살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정현주 지음, 예경 출판
내게 예술가 부부 중 닮고 싶은 부부를 묻는다면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 여사를 꼽을 것이다. 이상적이면서 서로에게 꼭 맞는 동반자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라디오 작가인 정현주 작가가 풀어낸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미국으로 삶의 터를 옮기기 전 한국에 살 땐 마음이 답답하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때 혼자 미술관에 가곤 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도심 속의 미술관은 그저 일상의 환기가 되고 전시관에 걸린 커다란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노라면 엉켜있던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 중 하나는 부암동 산자락에 위치한 환기미술관이다. 김환기 화백의 작품에 압도되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머물던 기억이 난다.
두 사람은 서로가 만나 기 전, 각자의 아픔이 있었기에 한 번 만나고는 오래도록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다 “곱게 살자”는 모토 아래 연합했다고 한다.
“수화(김환기 화백의 호)에게 향안은 시대가 만든 울분을 나누고 같이 아파해주는 사람이었다. 막막한 현실 가운데서도 그래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을 나누며 내일을 같이 그려가는 사람이었다.” p35
“수화와 향안은 매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각자가 알던 것은 함께 아는 것이 되었고 혼자 느낀 것은 이내 둘이 느낀 것이 되었다. 둘의 지성과 감성은 함께 있어 나날이 풍요로워졌다.” p38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 되는지 궁금하다며 파리에 가야겠다는 남편의 말에 틈틈이 프랑스어를 독학하고는, 프랑스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고 혼자 파리에 가서 그 다음 해 전시 준비까지 끝내놓았다. 예술가 남편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똑 부러진 아내 김향안. 요즘 이야기가 아니다. 때는 1955년, 시대적 상황이 상황인 지라 아내 향안은 두 사람이 함께 가는 것보다 혼자 가서 준비하는 편이 낫다고 야무지고 빠른 결단을 내린 것이다. 김환기 화백은 전시일까지 그림만 완성하면 되었다. 향안은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미술 공부도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는 본인 또한 미술과 예술을 알아야 남편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또 자신의 세계도 제대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본인과 남편을 각자의 인생을 넘어, 한 팀이자 하나라고 여긴 듯 하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미술을 깊이 공부하는 이유를 물으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남편이 화가인데 아내가 미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 가정생활은 절름발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부부란 서로 호흡을 공감하는 데서 완전히 일심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와 교감은 끊이지 않았고 문필가였던 그녀가 후에는 미술평론에까지 글의 영역을 넓혔으니 결론적으로 둘은 함께 성장한 것이다.
1956년 10월, 그녀가 파리에 온 지 1년 5개월 만에 김환기 화백의 첫 번째 파리 전시가 열렸다.
“자꾸 꿈을 꾸는 남자가 그 꿈을 현실이 되게 하는 아내를 만났다. 남자는 자꾸 큰 세상을 그렸고 아내는 그 큰 세상에 남편을 서게 했다. 함께 있음으로 해서 두 사람의 세상은 커지고 넓어졌다. 계속 꿈을 꿀 수 있었다.” p40
“향안은 ‘내조’라는 말 대신 ‘협조’가 그들 부부 사이를 더 잘 설명하는 단어라고 말했다.” p68
“출렁이는 두려움을 한순간에 잠들게 해주는 사람.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세상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해주고 나로 하여금 기꺼이 용기내서 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가게 해주는 사람. 때로는 입과 귀가 되어주고 때로는 세상을 만나는 통로가 되고 문이 되어주는 사람. 수화에게 향안은 그런 아내였다.” p86
상대의 가능성과 가치를 알아봐 주고 그를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 기꺼이 먼저 세상에 나아가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닦아놓는 동반자 향안. 결혼 전 신랑을 만나는 내내 깊이 기도하는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를 어디로 보내시든 돕는 짝, 돕는 배필로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주셨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때 그 마음들이 상기되었다.
활자로는 물론이거니와 영상으로도 타국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요즘과 달리 그 시절 혼자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어와 미술 공부를 하며 남편이 오면 그림 작업을 하게 될 아틀리에를 구해놓고, 전시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놓은 그녀를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같은 것을 좋아하고 관심을 기울이며 함께 토론하고 이해를 나누는 시간이 두 사람을 점점 더 단단하게 묶어 주었다. 관계는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빛이 났다. 시간이 흐르며 아름답게 길이 들어 더 좋은 것이 되던 두 사람 곁의 오래된 물건들처럼.” p104
두 사람의 낭만적인 파리에서의 삶.. 그리고 팍팍했던 뉴욕에서의 삶, 현재 미국 중서부에서 이방인으로 살고 있기에 시대는 다르지만 두 분의 이방인으로서의 삶과 애환이 상상이 되고 깊이 공감이 됐다.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화백이 아내에게 보내었던 편지엔 글과 함께 항상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편지 내용과 그 그림엔 아내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깊은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만을 바라보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함께 세상을 보았다. 고국의 현실을 아파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방법은 없는지 토론했으며 지성을 실천하기 위해 두 사람은 파리에서 습득해온 것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로 했다.” p131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지성이라고 하며 사회적 실천을 강조한 김환기 화백. 지식과 이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배운 것을 세상에 흘려보내고 변화되게 하는 것, 이게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
“춥고 어려운 날에도 그림과 사랑이 그들을 구원했다.” p161
그림 그리는 데에 있어 뜨거운 열정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고 건강이 악화됨에도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빠진 치아, 신경통, 그리고 목 디스크. 장신이었던 그는 그림을 그리며 생긴 디스크로 오랜 시간 고통받았다고 한다. 병원에서 권한 수술에 통증 없이 그림에 정진하고 싶은 마음으로 수술을 택했다. 1974년 7월 12일 오후 1시, 수술에 대한 짧게 쓰인 일기 후 “다음 날 그는 목 뒤 척추를 수술 받았다. 이후의 일기는 적히지 못했다” 이 대목에 마음에 무언가 쿵 떨어진 느낌이었다. 수술 후 2주도 채 안 된 1974년 7월 25일, 61세 나이에 김환기 화백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시절 두 분이 함께 빚어간 삶을 머릿속으로 같이 그려보다 갑작스럽게 떠나신 화백의 죽음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파리에서 함께 보낸 3년을 생에 가장 아름답던 시절로 추억하던 두 사람, 향안은 20여년만에 혼자서 다시 파리에 갔다. 함께 거닐던 곳들을 혼자 걸으며 남편의 빈자리를 아파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함이 컸지만 향안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화백의 가치와 그의 그림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글을 쓰고 전시를 열며 남편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76년에는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예술 정신과 이름 아래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끌기 위해 환기재단을 설립했다. 그녀는 부부의 꿈들을 하나하나 현실로 만들었다. 함께하는 내내 열렬히 그의 성장을 돕고 본인도 부단히 성장했던 향안. 화백이 세상을 떠나고서도 그녀의 노력은 계속 되었다. 마침내 1992년 11월 5일, 향안의 애정과 마음이 가득 담긴 환기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화백의 20주기 전시도 결혼 50년 금혼 기념전도 그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두 분이 떠난 지금도 여전히 그곳은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감과 부부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삶을 개척하는 용기를 얻었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스스로도 성장하여 결국엔 독립된 존재로서 자신을 세웠습니다. 세상이 남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동시에 스스로도 충분히 빛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p243
소울메이트는 인연이 처음이 아니라 인연이 마지막에 말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정현주 작가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끝까지” 잘 사랑하는 일이란 얼마나 중요하고 또 쉽지 않은 일인지.
“나의 성장이 그의 성장을 이끌고 그의 성장이 또 나를 성장하게 하면서 서로에게 점점 더 잘 맞는 반쪽이 되어가는 일. … 소울메이트는, 사랑하여 노력하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란 함께 성장하는 일입니다.” p246
김은진 (윌로우리버 연합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