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과 평화와 청년
<서부전선 이상 없다>, 에리히 리마르크/ <무기여 잘 있거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느 유튜브 채널에서 국내 랭킹 1위 아마추어 선수와 전직 국가대표 선수의 베드민턴 경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경기 전, 아마추어 1위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자기 실력이면 웬만한 프로 선수랑은 해 볼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은퇴한 전직 선수 정도야.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고 반 세트도 안 돼서 아마추어의 자신감은 땅바닥에 떨어집니다. 5대0, 8대0으로 질질 끌려다니다, 전직 국대가 한 점을 봐주기로 마음 먹어야 겨우 한 점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아마추어는 놀이일 때까지만 봐줄만합니다. 운동경기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모든 분야가 그렇습니다. 아마추어가 프로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정글의 법칙에 지배를 받습니다.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아마추어는 결국 끌려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추어가 절대로 다룰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평화는 프로들의 세계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문제입니다. 정치에서는 평화를 다루는 실력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입니다.
우리나라 언론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절대로 말하지 않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젤렌스키 대통령의 아마추어 정치가 전쟁의 도화선이 되리라는 경고가 수도 없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언론이 말하지 않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북한이 쏘아올리는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엔진 기술을 제공한 국가가 우크라이나라는 사실입니다.(중앙일보 2017. 8. 16 <“북한 ICBM 엔진은 우크라이나 기술” 보고서 국제 사회 일파만파>)
평화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역학 관계 위에서 균형을 잡는 일과 같습니다. 섣불리 올라탔다가는 헤어나기 힘든 덫이 될 수도 있고, 목숨을 내놓고 벌이는 외줄타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평화의 가장 큰 적은 쉽게 전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전투에 나가지 않는 자들입니다. 후방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자들, 전투에 패배해도 가장 먼저 도망갈 수 있는 자들이 전쟁을 일으킵니다. 게다가 이 땅에서 전쟁을 쉽게 이야기하는 자들은 대부분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자들, 자기 자녀는 군대에 보내지 않는 자들입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리히 리마르크), <무기여 잘 있거라>(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 소설입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동맹국에 속한 독일군의 입장에서, <무기여 잘 있거라>는 협상국에 속한 이탈리아군의 입장에서 전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두 작품은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1차세계대전은 현대전의 서막을 알리는 전쟁이었습니다.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해 천문학적인 사상자를 낸 최초의 전쟁이었습니다. 현대적인 군사훈련 교본의 모태가 된 것도 바로 1차세계대전입니다.
두 작품은 서로 반대 진영에서 1차 세계대전을 그립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젊은이가 경험하는 전쟁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진영을 막론하고 젊은이들은 전쟁을 일으킨 정치인들의 소모품이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죽거나 살거나. 대량살상무기 앞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거나, 살더라도 전쟁이 준 깊은 상처를 끌어안고 살거나. 서양에서는 1차세계대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젊은이들을 가리켜 <잃어버린 세대>라고 합니다. 이들은 전쟁을 통해 경험한 허무한 죽음과 공포로 인해 인생과 사회에 대한 환멸과 냉소를 지니게 됩니다.
5월은 가정의 달,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이 있는 달입니다. 그리고 청년 주일(5월 3주)이 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청년주일은 외세의 침탈과 국난으로 이 땅이 어려울 때 앞장서서 복음의 등불이 되고자 했던 엡웟 청년회 활동에 시초를 두고 있습니다.
시대의 등불이 될 수도 있는 청년들을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만드는 것만큼 야만적인 일은 없습니다. 요즘은 전쟁도 아닌데, 청년들이 혐오의 총부리를 겨누는 일이 일상다반사입니다. 이러다 전쟁없이 <잃어버린 세대>를 만드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청년에게 혐오를 주입하고 이용하는 이들, 그들은 아무리 청년을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청년의 적(敵)일 뿐입니다.
우동혁 목사 (만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