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필립 얀시 지음, 김성년 번역, IVP, 2012)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여름 수련회에 갔을 때입니다. 반별 공과 시간에 자신만의 경험과 언어로 하나님을 설명해 달라고 담임 선생님들께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 한 선생님의 설명이 십 년이 더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들을 잠도 주무시지 않고 관찰하고 계셔, 그러니까 죄지으면 지옥 가요.” 어깨너머 우연히 들었지만 당황스럽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저의 설명은 그 선생님의 설명보다 얼마나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을지 생각해보니 더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을 언어로 정확히 포착할 할 수는 없으리라 스스로 위로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경계하며 무지와 게으름과 씨름하는 일이 이제는 제 삶의 일부분이 된 것 같습니다. 목사로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보다 설교가 익숙해지는 것 같아서, 제목에 끌려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왜 1세기가 하나님이 세상으로 들어가는 적기였을까?’, ‘로마의 인구 조사는 가장 한 명만 가도 충분했을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가 자기 동네에서 아이를 낳는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굳이 임신한 그녀를 베들레헴까지 온 건 아닐까?’ 저자인 필립 얀시가 책의 서두에 담은 질문입니다. 책의 서두부터 새롭고 신이 났습니다. 이런 신선한 질문들이 예수님에 관한 설명을 어디로 이끌 것인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명한 복음주의 저술가답게 예수님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교회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성자 예수님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연구에 관한 저자의 지식과 성서에 대한 참신하고 진중한 접근 때문에 제목처럼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를 여러 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화나 영화 속의 표정, 감정이 지극히 절제된 예수님이 익숙한 분일수록 좋은 만남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너 정말 인간이 될 수 있어?”, 저자가 예수님이 광야에서 당한 시험의 내용의 요약한 말입니다. 배고픔과 경작의 수고 없이 떡을 맛보는 것, 위험 상황을 직면하되 진짜 위험을 없는 것, 고통스러운 거절에 대한 불안 없이 유명세와 권력을 누리는 것, 이와 같은 시험의 내용을 십자가 없이 면류관만 쓰는 삶에 대한 제안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 시험은 예수님의 사역 ‘스타일’에 관련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권세와 사탄의 권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선은 외부에서, 또는 위에서 아래로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내부에서, 아래에서 위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중하며 의가 성장하도록 기다리는 방식을 취하시는 것은 사랑 때문이며 사랑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는 유일한 능력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기독교 역사와 지금 우리 기독인들의 모습 속에도 그리스도의 길을 편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무수히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부와 권력과 명예의 수단 삼은 모습들이 떠올라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으면 분노하는 내가 오히려 바리새인이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시선이 마음을 찌릅니다.
책의 두 번째 파트, ‘예수님은 왜 오셨는가’에서는 산상수훈의 ‘팔복’과 예수님의 절대적인 메시지와 극명히 대비되는 인간의 턱없이 부족한 이해와 실천에 관한 저자의 고민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명, 기적, 죽음, 부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전개됩니다. 책의 마지막 파트는 ‘예수님은 무엇을 남기셨는가’입니다. 여기서는 승천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예수님이 이루신 변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의 나라는 인종이나 계급처럼 서로를 분리시키는 것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던 혼혈인이든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든지, 누구든지 간에 예수님의 나라에서는 환영받았다는 저자의 지적이 마음을 깨웁니다.
하나님 나라는 방금 낙태 수술을 하고 나오는 여인을 사랑하라고, 에이즈로 죽어가는 문란한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는 부유한 지주를 사랑하라고 부르신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내가 진실로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한 건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330)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은 것처럼, 성경 말씀을 근거랍시고 원수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 혐오하고 배척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무겁습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 바보라고 말하는 것, 정욕, 이혼, 폭력 등에 관한 예수님의 절대적인 메시지는 혹시 죄인끼리 그러지 말라는 뜻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김국진 목사(산돌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