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생명 사상의 뿌리
<한국 생명 사상의 뿌리>, 이경숙·박재순·차옥숭 지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과학 기술의 진보를 통한 현대 문명의 성과들은 그동안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모두 환호해마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정치·경제·군사·문화의 위기, 자연 생태계의 위기 등을 직면한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과연 발전이었는가 하는 회의감마저 갖게 한다.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가 되어버린 많은 이슈들과 이제 와서 되돌아 갈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는 방향성 앞에서 우리는 난감하다.
생명 공학과 유전자 공학에 의한 생명 조작 기술, 생명 복제와 인간 복제 기술은 생명과 인간의 존재 자체의 위기마저 초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책의 저자들은 서구의 산업 문화에 의해 주도된 20세기 문명의 생명 파괴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정의와 자유, 생명 사랑과 생태계 회복, 여성 해방과 살림의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는 생명 윤리를 모색하고 있다.
특히 20세기의 우리나라 인문학이 주로 서구 사상에 기대왔음을 반성하고 우리 한민족의 고유한 생명 사상을 밝혀냄으로써 학문적 주체성을 고취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반생명적 경향을 띠는 현대 기술문명이 생명 친화적인 기술 문명으로 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이원론적·기계론적 사고가 전일적·유기체적 사고로 바뀌어야 하며, 유전 공학적인 능력이 악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법적·제도적 장치와 구조를 마련해야 하지만 그 바탕엔 역시 철학적·신학적 윤리와 원칙의 확립이 전제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서구적 세계관에 기대왔던 삶에서 이제는 되돌아 나와야 한다. 위기를 맞이한 지금 우리가 찾은 것은 동양적 한국적 생명관이다. 한민족의 생명 사상, 민족 종교인 동학사상, 함석헌과 김지하의 사상 등을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사상의 전환점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한민족의 근원적인 생명 체험과 생명 이해를 ‘한’ 사상을 통해 밝혀 주고 있다. 밝고 따뜻한 생명을 추구한 한민족의 삶과 정신을 드러내는 말이 ‘한’ 이다.(42) ‘한’ 사상은 외래 종교의 사상을 흡수 동화하면서 한민족의 종교와 사상을 형성하는 원리가 되었다.(45) 최치원의 풍류도, 원효의 원융무애, 화쟁사상, 의천과 지눌의 교선일여의 사상으로 이어지다가 고려 말에서 조선조 말까지 ‘한’ 사상의 명맥은 끊겼다. 그러나 조선조에서도 기고봉, 이율곡, 정약용 등이 ‘한’ 사상의 명맥을 잇고 있다(46) 19세기에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은 한민족은 대종교의 ‘한아님’ 신앙, 동학의 인내천, 증산교의 신명과 해원상생, 원불교의 은(恩)사상에서 ‘한’ 사상을 활짝 꽃 피웠다. 19세기에 태동된 이러한 민중 종교들은 하나같이 민족적 자주성을 확립하고 세계 평화의 길을 제시했다.(46)
나는 恨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명 사상과 맥이 닿을 수 있을지 처음엔 의아했다. 그런데 특히 여자의 한을 살림의 힘으로 승화시킨 점, 물론 부당한 희생을 정당화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되지만 ‘남을 살림으로써 나도 사는’ 새로운 철학과 원리에로 나아간 점, 고난과 희생을 통해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여성의 삶을 통해 십자가의 아픔과 여자의 한이 통한다는 통찰에서 한과 생명사상이 만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멋진 통찰력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우리에게 풍성한 영성을 제공해 주는 차원의 통찰이라고 보인다. 저자는 복잡·미묘하며 역동적인 한민족 고유의 정서인 한(恨)이 가지고 있는 긍정성과 부정성 등등 다양한 함의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고찰해줌으로써 恨에 대한 이해의 폭이 한결 넓어지게 해주었다.
3장에서는 수운의 사상과 그를 이어서 사상을 더욱 심화시킨 해월의 생명 사상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중 그들의 사상은 모두 시대를 넘어서는 혁명적 사상이지만, 특히 해월의 향아설위(向我設位)는 실천적인 면으로 모든 틀을 뒤엎는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여겨진다. 각자위심(各自爲心: 천명을 돌아보지 않고 사람이 저마다 제멋대로 함)하지 않고 동귀일체(同歸一體: 하나의 진리, 즉 무극대도로 한결같이 돌아간다) 하라는 정신은 혼란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구심점같은 정신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커다란 문명의 위기 앞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의 생명 사상을 일깨워주고, 향할 바를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 여겨진다. ‘옛 것에서 새 것을 찾는다’는 온고이지신 정신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주은숙 (새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