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파커 J. 파머, 김찬호 옮김, 글항아리, 2012)
얼마 전 대선이 끝났다.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큰 실망을 겪고 있으리라. 특히 열성적 지지자일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할 것이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이처럼 정치에 마음 상한 이들을 향한 파커 J.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다.
파머는 미국을 대표하는 교육 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긴 세월 미국 시민들의 멘토가 되어왔다. 퀘이커 영성을 바탕으로 한 그의 메시지는 깊은 울림으로 수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998년에는 ‘미국 고등교육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되었으며, 2011년 대안언론 ‘유튼 리더(Utne Reader)’가 선정한 ‘세상을 바꾸는 25인의 예견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파머는 본서를 통해 정치·마음·민주주의의 상관관계를 생생한 현장 체험과 방대한 문헌을 제시하며 설명하고 있다.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왜 정치는 마음에 주목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이 정치적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마음이 부서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파머 식으로 표현하면 이들이야말로 비통한 자들(the Brokenhearted)이다. 정치적 비통함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으로 도피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파머는 마음이 부서지는 경험이 낯섦이라는 긴장을 끌어안은 채, ‘부서져 깨어나가는 마음’(broken apart)이 아니라 ‘깨어져 열린 마음’(broken open)이 될 때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고 교훈한다. 결국 ‘비통한 자들의 정치학’이란 현실 정치에 대한 절망으로 마음이 부서진 자들이 개인주의와 냉소주의를 극복하고 일구어내는 정치적 실천이다.
"이 시대의 정치는 '비통한 자들 the brokenhearted(직역을 하자면 마음이 부서진 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의 정치'다. 이 표현은 정치학의 분석 용어나 정치적 조직화의 전략적인 수사학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적 온전함의 언어에서 그 표현이 나온다. 오로지 마음만이 이해할 수 있고 마음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 정치에도 그러한 측면이 있는데 우리 모두가 의지하는 일상생활을 잘 다듬어 가려는 핵심적이고 영원한 인간적인 노력이 그것이다" (38쪽)
그러나 마음이 부서진 자들이 불신과 적대를 딛고 ‘상처입은 치유자’로서 일어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파머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창안한 ‘마음의 습관’이라는 개념을 소환하는 한편 오래된 퀘이커의 지혜와 마틴 루서 킹 목사, 링컨과 오바마 대통령의 공적 서사를 소개하며 끈질기게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회복에 나서라고 촉구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끝이 없는 실험이고, 그 성과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입니다. (중략) 가족, 동네, 교실, 일터, 종교 공동체 또는 다른 자발적 결사체 등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상의 장소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움직일 때, 우리는 지역 공동체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주체이자 옹호자로서 행동하는 힘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6,7쪽)
한국 사회 역시 파머가 근대성에서 비롯한 마음의 상태라고 명칭한 ‘무심한 상대주의, 정신을 좀먹는 냉소주의, 전통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경멸, 고통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적 상황이 배경이지만 ‹비통한 자들의 정치학›이 이 땅에서도 의미있는 까닭이다. 선거는 끝났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비통한 자들의 정치'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사과나무를 심자. 비록 우리 세대가 그 열매를 맛볼 수 없다 해도 언젠가 누군가는 풍성한 수확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애 안에 성취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진실하거나 아름답거나 선한 것은 어느 것도 역사의 즉각적인 문맥 속에서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고결하다 해도 혼자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 301)
진광수 목사 (바나바평화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