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사계절, 2018
질질 울다가, 어떤 페이지에서는 크게 웃으며 읽었던 장편소설을 어느 날 도서관 서고에서 발견했을 때, 어떻게 그렇게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품고 있는데도 주변의 공기는 미동도 없이 고요하기만 한 건지, 묘한 기분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고 책의 저자를 만나는 상상을 해봤다. 그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지 않는 것을 신기해할 것 같다.
책의 저자는 골성형부전증으로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열다섯 살까지 병원과 집에서만 생활했다. 현재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중이다. 저자에 관한 부족한 정보를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메우는 책이라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책의 내용은 제목을 보고 지레짐작한 정도를 까마득히 뛰어넘고 있다. 장애와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둘러싼 저자의 생각이 촘촘하고 치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기독교인으로서 약자와 소수자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내 생각이 오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주변에 장애인이 많지만 그들은 내 생각이 닿은 적이 없는, 나에게는 생경한 세계에서 놓였다는 사실을 저자는 삶을 통한 촘촘한 언어로 설명해 주었다.
저자가 인용한 서울대학교 장애 인권 동아리 턴투에이블의 <내 장애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의 서문의 부분이다.
우리는 모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한 번도 장애를 극복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극복할 생각이 없는, 허술하고 게으르고 이기적인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장애에 노련하지 않습니다. (중략)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련하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부정을 선언하는 힘에서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는 것을 넘어선 진정성을 기대한다. 저자에 따르면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자신은 몸, 운명, 삶, 실존에 대한 수용을 전제로 한다. 중대한 결핍이라 생각되는 속성과 경험을 진정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도 별로 없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 때조차 삶의 전반적인 기획의 일부로서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기꺼이 감당하는 결단을 의미한다. 그리고 저자는 ‘잘못된 삶’이라고 규정된 사람들이 스스로를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법과 제도의 수준에서 자신이 수용될 수 있도록 해온 과거와 현재의 노력들을 말한다.
나의 존재가 ‘잘못’이나 ‘손해’는 아닌지 따지고 묻는 마음, 오줌권을 외치는 마음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장애를 극복하고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이야기에 감동하곤 했는데 저자는 그런 시각을 ‘관조’라고, 그 대상을 내 삶으로 절대 들이지 않겠다는 태도라고 말한다. 내 무관심과 무지와 마음속 어두운 무언가를 자꾸만 들키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내용을 읽는 중에도 깔끔한 문장과 명석한 구성을 장애라는 저자의 상황에 빗대어 보는 내가 수시로 한심했다. 저자를 향한 감탄은 번번이 나를 향한 개탄으로 이어졌다. 저자의 삶이 낳은 문장은 새로운 이해와 동의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줄을 긋고 싶은 부분에 다 줄을 그었다면 책이 너덜너덜해졌을 것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빌려 읽는 터라 첫 장부터 시작된 줄을 긋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는 고생이 책을 덮는 순간에야 비로소 멈추었다.
김국진 목사 (산돌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