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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23]
 
 
 
     
 
 
 
작성일 : 22-03-09 23:20
   
초월자의 감각
 글쓴이 : dangdang
조회 : 12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7120 [121]


 

초월자의 감각

 

<초월자의 감각: 교회력에 따른 감각적 성경 읽기1>, 심광섭 저, 예술목회연구원, 2021

 

‘성모영보(聖母領報)’, 곧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受胎告知)’를 했을 때 성모 마리아가 취한 다섯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곧 ‘놀람, 사색, 반문, 순종, 은총’입니다. <초월자의 감각: 교회력에 따른 감각적 성경 읽기1>을 읽은 후 받은 느낌이 바로 이 다섯 가지 감정입니다.

 

첫째 ‘놀람’입니다. 평소 교회력 설교를 진행하고 있는 저에게 교회력에 따른 성경 읽기는 한국교회 교인들의 수준을 말씀 중심으로 이끄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력에 따라 회화를 분석하여 감각적으로 성경을 읽는 이 책은 놀람 그 자체였습니다. 특별히 예술 신학에 관심이 많은 저의 경우, 고민이 같고, 앞서가신 저자의 통찰을 엿볼 수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둘째 ‘사색’입니다. 저자의 글은 글의 미학적 완성도는 물론 신학적 사유에 있어서 많은 사색을 하게 만듭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글은 신학적 사유의 종착점을 꿰뚫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본성론이나 영혼론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물의 본질(ousia)론이 아니라 이 땅 위에 하느님의 통치의 도래(parousia)를 알리는 시간론이며 역사적 사건의 선언이다. 하느님 나라의 시간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후설에 이르는 서양 철학사에 면면히 흐르는 선형적 혹은 원형적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신선한 출발, 곧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늘 지금이며 꼼지락거리는 생성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늘 지금은 그리스도적 생명 사건인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함으로써 자유롭고, 자유 안에서 사랑한다.”

 

여기 ‘늘 지금’, ‘꼼지락거리는 생성’은 니체와 들뢰즈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알파와 오메가입니다(필자가 보기에). 또한 신학적 사유의 종착점입니다. 이렇게 저자의 글은 글 자체가 미학적이고 입맛에 와닿습니다. 그리고 그 맛은 사색을 통해 신학적 사유의 그 깊은 맛으로 나아갑니다. 

 

셋째, ‘반문’입니다. 이것은 한국 신학계에 외치는 물음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진선미(眞善美)에서 진과 선의 우위를 고집할 것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진리(眞)의 창조자이시며 선(善)의 근원자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미(美)의 완성자이십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진선미에서 진리와 선함만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 결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 건축에 미학이 없고, 신학에 예술이 없고, 성도들의 삶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져, 단지 형식적인 경건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신사빈 박사님도 추천사에서 언급했듯이, 이코노클리즘(iconoclasm, 성상파괴)은 항상 미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만약 미술을 숭배가 아닌 해석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미술 작품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고 신앙을 풍요롭게 하는 매개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네 번째 단계인 순종으로 나아갑니다.

 

넷째, ‘순종’입니다. 여기서 순종은 화가의 작품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아니 그 그림을 분석한 저자의 글에 풍덩 잠기는 것입니다. 물론 저자가 다루고 있는 화가들의 작품은 성화가 대부분이기에 신앙적으로 자연스럽습니다. 플랑드르 미술의 대가인 한스 멤링의 작품과 성상 파괴를 옹호한 칼뱅주의가 지배적이었던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은 교회력 절기에 따라 그리스도의 일생을 시각적으로 엿볼 수 있도록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순종하면서 글과 그림 해석, 그리고 상황에 맡게 곁들여지는 시(詩)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외 시몬느 마르티니, 산드로 보티첼리, 프라 안젤리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라파엘로 등의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빈센트 반 고흐도 있습니다. 저자의 글은 모두 화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순종하며 글을 읽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화가는 하느님의 사제이자 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저자가 언급하는 화가에 관해서 살펴볼까요? 

 

“화가는 하느님 나라를 말과 글 대신 그림으로 보여주어 느끼게 하는 사제다. 화가는 복음을 신화적 상징과 명암과 색채로써 표현하는 신학자다. 신학과 철학이 추상적 개념과 연역적 논리를 사용하는 반면, 성경은 주로 이야기와 노래, 시와 은유와 역설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 점에서 성경은 후대에 발전된 논리적 신학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직관적 그림에 더 가깝다. 그린다는 것은 실재를 있는 그대도 모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다채롭게 표현하는 것이고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예술은 작품을 통해 예수님께서 마음속 깊이 품은 생각까지 교감할 수 있게 하고, 생각의 응집인 개념을 감각을 통해 몰랑몰랑 풀어볼 수 있게 한다.”

 

마지막 다섯째 ‘은총’입니다. 책을 덮는 순간, 저자가 성화를 표현할 때 쓴 글처럼, 저에게는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감정입니다. 놀라운 은총입니다. (성화를 책으로 바꾸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성화는 과거를 기억하여 초월적 실재를 마음에 불러내고 하느님 경험을 매개한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초월적 현존이 인간의식의 자기-현존 안에서 경험된다. 하느님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내가 나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나 자신에게 가까이(interioi intimo meo) 계신 분임이 확인된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구원은 ‘예수’가 아니라, ‘예술’에서 올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억압된 리비도가 승화된 가장 뚜렷한 표식과 상징이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신학계에 ‘예술 신학’, ‘기독교 미학’을 소개하고 앞장서 오신 저자 심광섭 교수님의 책은 이렇게 ‘놀람에서 은총’으로 끝나는 독서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기독교 신학의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것은 곧 미적 감각의 깨어남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감각은 초월자의 감각에서 주어집니다.

 

최병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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