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하고 소중한 여성들의 연대 이야기
(<밝은 밤>, 최은영, 문학동네, 2021)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이었다.
2021년 오늘, 저 문장은 이해되지도 와닿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와 닿는다.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흔히 말하는 굴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거쳐오며 숨겨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라는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최은영의 소설을 처음 읽은 건 "내게 무해한 사람"이었다. 극적인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언가 담담하게 가슴을 울리는 지점이 있었다. 단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여성작가의 꽤 긴 호흡의 책이 오랫만에 마음에 닿았었다. 그녀의 장편 <밝은 밤>은 100년에 걸친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백정의 딸로 태어나 위안부로 끌려갈 위기를 맞았던 증조할머니, 6.25전쟁을 거치며 개성에서 희령이라는 도시까지 피난을 와야 했던 할머니, 어린 딸을 먼저 떠나보낸 엄마, 30대에 이혼녀가 된 나.
이렇게 선굵은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작가는 역사에 매몰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삶을 살아간 여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을 가졌지만 백정의 딸로 태어나 땅만 보고 살아야 했던 삼천이는 낯선 남자가 내민 손을 잡고 병든 어미를 버려두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지만, 그 낯선 남자에게 일생 귀히 여김을 받아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저 탈출을 시켜 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한다고 되뇌이며..
그런 그녀의 유일한 벗은 새비였다. 새비는 삼천을 귀히 여겨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삼천이의 딸이자 나의 할머니 영옥. 20년이 넘도록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손녀에게 살포시 다가가 "내 손녀랑 참 많이 닮았어요" 라고 살짝 웃음을 건네주는 세련된 할머니. 중혼인걸 알면서도 자기를 시집보내버린 아버지 덕에 내 아이를 낳고도 남편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채 평생 홀로 딸을 키웠던 할머니. 주어진 일은 받아들이면 되는거라 생각했던 그였지만, 이혼을 하고 돌아온 나에게 "안다, 알어" 라고 더 이상 캐묻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게 품어준 그 힘이 그녀를 살게 했을 것이다.
나와 엄마의 관계가 어째서 틀어져버렸는지에 대해,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가 몇 십년이 지나도록 연락없이 지내는 관계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짐작컨대 엄마와 딸은 서로의 아픔을 직면할 수 없다. 서로의 아픔을 가장 적나라하게 내보이면서도 절대로 아프지 않은 것처럼 서로에게 철저한 가면을 쓰고 생채기를 낸다. 그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인양. 호된 시집살이를 한 나의 엄마는 어린 딸을 잃고서 그것이 없었던 일인양 자기 안에 죄값으로 묻어두고 살았을 터. 그리움을 내뱉는 것도 금지된 것인양. 하지만 언니를 그리워하고 언니 속에 파묻혀 있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둘째딸에게 그것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삼천과 새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로 그것을 화자인 나에게 전해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없었던 여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귀히 여기며 존중하며 살아내었는가를 말하고 있다. 굳이 여성의 연대라는 말까지 표현하지 않더라도 나를 귀히 여겨주는 한 사람으로 인해 나는 귀한 존재가 되어간다. 그들은 서럽고 슬픈 삶을 살았다. 남편에게 귀히 여김 받지 못하고, 자녀를 잃어버리고, 평생을 혼자 살며, 젊은 나이에 이혼녀가 된 어떻게 보면 무언가 결핍되고 부족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 서러움과 결핍을 메워주고 희망으로 바꾸어 나가는 힘은 결국 함께함이었다.
나라는 개인의 역사는 오롯이 나를 통해서만 완성되진 않는다. 우린 모두 복잡한 씨줄과 날줄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엮여 있다. 기억되기를 바라는 모습이 있고, 기억되는 모습이 있고, 그래서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기 원하는 나도 있다. 그치만 그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결국 내가 된다. 그래서 상담에서는 어린 시절의 나에 대해서 부모에 대해서 자꾸 묻기도 한다. 나를 형성해준 것이 어떤 분위기와 어떤 느낌과 어떤 얼굴이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나의 숨은 역사를 살펴내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소란스럽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연대하고 환대하며 위로하고 함께함의 힘을 담담히 말해가는 작가의 말건넴이 참 좋다. 결국 삶은 수행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누려야 할 것임을 담담하게 말건네고 있기에.
그리고 작가가 말하는 이런 문장이 나는 참 좋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 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밝은 밤>,p.34
밝은 밤 이라는 형용모순적인 제목 속에서 나는 실제로 밝은 밤을 꿈꾸어 본다. 어둡고 서럽고 쓸쓸한 세월의 밤을 걸어온 그녀들에게 실제 손에 잡히게, 또는 멀리서 마음으로 응원하며, 또는 그 기나긴 치유의 이야기를 듣고 들려줌으로 그 어두운 세월의 밤, 현재의 밤은 어둠을 감싸는 빛이 되어감으로...
따뜻하고 소중한 여성들의 연대 이야기로 읽히는 이 소설의 일독을 권한다.
권미주 목사 (희망나무 심리상담센터 대표)